실론불교4 / 실론의 민족불교운동

BUTTON_POST_REPLY
lomerica
전체글COLON 427
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실론불교4 / 실론의 민족불교운동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22, (일) 12:32 pm

사진 1: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
(Migettuwatte 또는 Mohottiwatte Gunananda Thera 1823-1890) 비구스님

사진 2: 대령 헨리 스틸 올코트 신지학회장
(Colonel Henry Steel Olcott (1832–1907)

사진 3: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Anagarika Dharmapala(1864-1933)
스리랑카 불교부흥운동가 및 작가

실론(스리랑카) 불교가 현대 세계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실론 불교 자체의 불교사를 보면 우여곡절이 너무 많지만, 인도불교의 원형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동남아 지역인 버마(미얀마) 시암(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일부 지역과 중국 남부인 운남성 일대에 전해준 것은 너무나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다. 실론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의 일이다. 기원전 3세기의 인도불교의 중심이었던 마가다(지금의 파트나 지역)국에서 직접 전해졌기 때문이다. 2천3백년의 불교사를 간직한 실론불교는 인도불교의 원형을 보유한 종가(宗家)임에 틀림없다.

실론은 인도와 실론의 주 인종인 싱할라족과 언어가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므로 어족(語族)이 같고, 매우 이른 시기인 기원 전후에 삼장(三藏)을 싱할라어로 번역 편집하여, 장경(藏經)의 체계를 세웠다. 삼장결집(三藏結集)의 역사가 무려 2천년이나 된다. 기원후 5-6세기가 되면 인도 亞 대륙은 전 지역이 불교권이 되고, 남인도 지역 또한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한다. 아울러서 실론 또한 불교가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무렵 실론의 북부지역인 아누라다뿌라는 작은 마가다와 같은 불교 수행과 학문의 중심지가 될 정도였다. 인도 亞 대륙의 불교는 여러 분파가 혼재한 부파불교시대였고, 대승불교까지 대두된 그야말로 불교의 춘추전국시대였지만, 실론은 인도불교의 원형인 상좌부 불교를 오히려 간직한 종가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렇다보니 인도나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에서 까지 유학승이 몰려올 정도였다. 한 때 대승불교가 유입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실론의 불교통사(佛敎通史)는 다음 기회에 다뤄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서구의 식민개척과 선교로 개종의 압박을 받으면서 불교쇠멸의 극한 상황에서 민족불교운동의 대두를 살펴보자. 실론 불교는 서구 식민열강이 침입하기 이전에는 비교적 무난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럽의 열강들이 들이닥치면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실론 불교는 16세기 이후, 기독교 선교사들과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브리티시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기독교(개신교)로의 개종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19세기 초에 이르면 미국의 선교사까지 합류하게 된다. 미국은 1813년 실론 북부인 자프나에 선교본부를 세울 정도로 실론은 선교대상국으로서 좋은 터전이 된 것이다. 침례교 선교는 1792년에, 웨슬리 감리교 선교는 1814년에 영국 성공회는 1818년에 실론에 자리 잡게 된다. 이들 선교단체는 식민정부의 지원을 받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 선교단체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에 돌입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사원은 신교육에서 경쟁이 될 수가 없었다. 구한말 대한제국 시절에 우리가 다 경험했던 일이 아니던가.

이렇다 보니 불교와 선교사들 간에 자주 충돌이 발생하고 토론에 의한 논쟁이 있게 되었다. 이런 일은 비단 실론 만이 아니고, 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났던 종교간 논쟁이었다. 실론의 이 ‘파나두라 대논쟁’은 결과론적으로 실론의 민족불교 운동을 촉발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고, 실론 불교 부흥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 일대 사건이었다. 게다가 이 사건이 있고난 후, 1880년 미국인으로서 군 간부인 대령 출신으로 저널리스트, 변호사로서 신지학회(神智學會) 초대 공동 회장이면서 불교도였던 헨리 스틸 스콧트(Henry Steel Olcott) 대령이 실론을 방문하여, 이런 참상을 보고 듣고, 실론의 전통불교 보호를 위해서 협력하고 이에 힘입어 실론 불교도들은 민족 불교운동과 부흥운동을 가속화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파나두라 대논쟁’은 1860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불교와 기독교간의 교리적 논쟁으로서 절정을 이룬 1873년의 대논쟁이다. 논쟁을 시작할 무렵 미게투와테 구나난다는 사미 신분이었고, 어려서 선교재단에서 세운 학교에서 기독교 교리를 어느 정도 배운 경험이 있었지만, 나중에 사원에 들어와서 불교를 접하고선 불교 철학이 더 수승하다는 것을 확신한 상태였다. 몇 차례 공개토론을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비구)와 데이비드 드 실바 감리교 신부 사이에서 ‘파나두라 대논쟁’이 일어났던 토론식 논쟁이다. 파나두라는 수도였던 콜롬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한 제법 큰 타운이다. 이 ‘파나두라 대논쟁’은1873년 파나두라 지역에서 양측 지지자인 7천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공개 대토론 논쟁이었다. 논쟁의 결과는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의 승리라고 알려지고 있지만, 실바 신부 측은 자신의 승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논쟁을 기점으로 실론의 민족불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실론의 불교도들은 긴 잠에서 깨어나 불교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데 이 논쟁의 의의가 있다.

식민열강들의 각축장이 된 실론은 모든 분야에서 주권을 상실한 그야말로 브리티시의 직할 식민지로 전락하여 불교 또한 아사직전까지 가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실론의 불교도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직할 식민지였기 때문에 성공회에서 분리된 감리교 신부라고 할지라도 지배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甲의 입장에서 토론에 임한 실바 신부는 이미 싱할라어는 물론이고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능통한 동양학 학자 급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는 아직 젊고, 실론의 사원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토론에 임했고, 논쟁을 승리로 이끈 배경은 인도 날란다 대학의 대학승이었던 디그나가(Dignāga)와 다르마키리티Dharmakirti)의 논리학 저서들에 힘입은 바 컸다.

디그나가는 중국 한역 불교권에서는 진나 논사(陳那論師/域龍 c.480–c.540)로서 인도 불교 논리학의 대가이다. 불교에서는 논리학을 인명학(因明學)이라고 부른다. 다르마키리티는 중국권에서는 법칭(法称 7세기)이라고 하며 진나논사의 재전(再傳) 제자로서 진나논사의 학맥을 계승한 대학승(大學僧)이다. 이들의 학맥을 이은 실라바다라(Śīlabhadra(戒賢529–645) 논사는 중국 당 나라 현장 삼장의 은사로서 당시 날란다 대학 학장으로 계셨다. 이 분들은 다 유식계통의 학승들로서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 4세기)의 후예들이다.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를 포함한 실론의 비구들은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된 이 분들의 저작을 학습하는 것이 필수였다. 이런 논리학에 대한 학문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어떤 토론에 대해서도 회피하지 않고 논쟁에 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이런 불교 논리학 전통이 강한 불교가 티베트 불교권이다. 아무튼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는 ‘파나두라 대논쟁’을 통해서 국내외적으로 유명해졌고, 대 웅변가적인 설법사(說法師)로 등극하고 논쟁 내용은 영어로 정리되어 1878년《불교와 기독교의 대면》이라는 타이틀로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올코트 대령은 이 책을 읽고 난후 1880년 실론으로 달려와서 실론의 민족불교부흥운동을 지원하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세계불교기(世界佛敎旗)의 도안을 도왔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에게 조언하였다. 또한 근대 실론 불교의 뛰어난 지도자였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올코트는 미국의 군인 간부 출신으로서 신지학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가였기에 그는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고, 실론의 불교 부흥운동을 지원할 수 있었다. 실론에 와서는 1880년 6월 17일 불교신지학회를 창립하여 교육과 시회복지 활동을 전개한다. 올코트 대령이 실론에 왔을 무렵에는 세 개의 불교학교가 있었으나, 올코트는 오자마자 불교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40년에 이르면 429개의 불교재단 학교가 된다. 그는 싱할라어와 영문 불교신문과 잡지를 창간케 하는 등, 실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된다. 그러므로 실론 특히 불교계는 올코트 대령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올코트 대령은 교육과 저널리즘 뿐 아니라 세계불교기 도안. 제작에도 일조한다.

불교기(佛敎旗)는 1885년 미게투와테 구나난다 장로를 위시한 콜롬보 위원회에서 올코트 대령의 도움을 받아서 도안.제작하여 그 해 웨삭의 날(부처님의 탄생 성도 열반)에 처음으로 게양하였고, 1950년 세계불교도우의회 창립대회에서 세계불교도기로 확정되었다.

사진 4: 불교기

여섯 개의 수직 밴드는 부처님께서 성도하실 때, 부처님 몸에서 발산한 6색(色)을 상징한 것이다. 파란색은 빨리어로 닐라(Nīla)라고 하며, 자비 사랑, 평화, 우주 애(宇宙愛)를, 노란 색은 삐타(Pīta)라고 하는데 중도(中道)를 의미하며 양극단과 공허함을 피한다는 뜻이다. 빨간색은 로히타(Lohita)라고 하는데 수행의 축복으로서, 성취.지혜.덕. 행운과 위엄을 상징하며, 하얀색은 오다타(Odāta)라고 하는데 법의 청결이며, 해탈(자유)과 시공의 초월로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오렌지색은 만제스타(Manjesta)라 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지혜를 상징한다. 그리고 여섯 번째 수직 밴드는 공중에서 앞의 다섯 색깔의 합성으로서 조화를 뜻하면서 분광(分光)하는 빛의 본질을 상징한다.

실론불교는 비록 인도불교의 원형을 간직한 종가였다고 할지라도, 유럽식민지 개척 열강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실론불교는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이럴 즈음에, 미게투와테 또는 모호띠와떼 구나난다 장로 같은 젊은 패기 있는 비구들에 의해서 기독교 선교에 대응하여 논쟁을 벌인다. 자칫하다가는 2천 2백년의 불교전통이 하루아침에 무너진다는 위기감에서 시작된 선교사들과의 논쟁은 결국 실론 불교도들의 각성과 민족불교부흥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미국출신이지만, 실론불교 전통의 보호와 실론불교 근대화에 자문역할을 하고 실질적으로 재정지원을 한 올코트 신지학회 회장의 역할이 너무나 컸다고 하겠다. 올코트 신지학회 회장의 영향을 받은 아나가리카 다르마 팔라는 스리랑카 불교부흥운동가 및 작가로 성장하여, 인도불교성지 보호와 복원에 큰 공을 세우게 되고 인도와 실론에 마하보디소사이어티(Maha Body Society 대각회)를 창립하여 지금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스리랑카의 종교는 불교 70% 힌두 12% 무슬림 10% 기독교 7%가량 되는데, 실론 비구들의 위상은 막강하다. 그들의 위상은 스리랑카의 민족지성을 대변하고 하고 있을 정도다.

이치란 박사
해동경전어아카데미 원장
세계불교도우의회 집행이사

-------
사진은 나중에 추가 입력함.

BUTTON_POST_REPLY

다시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