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불교6 / 인도불교성지복원과 대각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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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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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실론불교6 / 인도불교성지복원과 대각회- 2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6-12-20, (화) 1:42 pm

인도불교성지복원과 대각회-2


사진1:인도 비하르 주, 보드 가야에 있는 대탑(대각사).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곳 보리수 아래서 대각을 성취, 2백년 후, 아소카 대왕이 방문하고 최초로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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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인도 콜카타에 소재한 대각회 본부.
실론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1892년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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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회(前回)에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인도 보드 가야를 방문해서 대각사가 힌두 승려들의 손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을 보고, 대각회를 설립해서 인도의 불교유적지 보호와 불교도에 의해서 이들 지역이 관리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을 소개한 바 있다. 대각회는 보드 가야 대각사의 이름에서 대각회로 명명한 것이다. 마하보디 소사이어티(대각회)는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와 영국의 시인이요 저널리스트인 에드윈 아널드 경이 함께 설립한 하나의 남 아시아불교회인데 목적은 인도의 불교 소생과 보드 가야, 사르나트와 쿠시나가라의 불교성소(佛敎聖所) 복원이 목적이었다.

사진3:아소카 대왕 시대 전도사를 파견한 불교전법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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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인도에서 기원전 6세기에 발생해서,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 시대에는 국교(國敎)로 인정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불교는 인도 亞 대륙만이 아닌, 실론 섬과 북인도를 경유하여 중앙아시아 서역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불교가 확장되어 전파되었다. 불교가 비록 6세기에 발생했지만. 난다왕조를 무너뜨리고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찬드라 굽타에 이어서 아소카 대왕(Ashoka the Great,304-232BCE)이 인도를 통일할 때 까지만 해도 불교는 인도 마가다 지역인 이른바 뿌라띠마(Puratthima 동부지역)라고 해서,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아소카 대왕이 불교도 왕이 되고, 불적지(佛跡地)를 순례하고 감동을 받은 다음, 당대의 큰스님이셨던 목갈리뿌따 띠싸(Moggaliputta Tissa, 327–247 BCE) 왕사의 자문을 받아서 불법을 널리 전파하게 된다. 이 시기에 불교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인도전역은 물론 인도 이외의 지역에 까지 불교 전도사를 파견해서 전법활동을 하게 되며, 아소카 왕은 자신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와 딸인 비구니 상가미따를 직접 실론 섬에 보내서 불교를 전파시켰다.

실론 출신 유명한 불교학자인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 2014년 서거)의 연구에 의하면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는 중도(中道) 사상의 대가로서 나가르주나(Nāgārjuna 150–250 CE)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목갈리뿌따 띠싸 대장로는 아소카 대왕의 후원을 받아서 제3차 결집(結集)을 주도하게 되고, 이후 불법을 9개 지방에 전파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아소카 대왕의 딸인 상가미따(Saṅghamittā, -281BCE)는 보드 가야 대탑 사원에 있던 보리수 오른편 남쪽으로 뻗은 가지를 실론에 가져다가 아누루다푸라에 있는 마하비하라(큰 절) 경내에 심었다. 지금도 이 보리수는 건재하다. 현재 보드 가야의 보리수는 실론의 이 보리수에서 가지를 다시 이식한 것이다. 보드 가야의 원래 보리수는 12세기 무슬림들에 의해서 베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 보리수의 손자뻘이 되는 보리수라고 할 수 있다.

보드 가야 대각사(대탑)는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실론과는 보리수로 인한 깊은 인연이 있다. 고대시대부터 실론의 불교도들은 보드 가야의 대탑과 보리수를 참배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 왔으며, 기원전부터 보드 가야에는 실론의 사원이 별도로 건립될 정도로 보드 가야와 실론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슬림들의 공격으로 이런 역사적 관련은 단절되었고, 19세기 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를 만나서 다시 주목을 받게 됐다.

사진4:상가미따가 기원전 3세기 인도 보드 가야에서 실론으로 가져온 보리수 지금도 마하 비하라에 보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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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인도 보드 가야 대탑(대각사)에 있는 보리수로서 실론에서 이식해 온 보리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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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사는 항상 전성기가 있으면 쇠퇴기가 있는 법이다. 왕성했던 인도불교는 굽타왕조(320-550)와 팔라제국(8-12세기)시대가 되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중국의 구법승인 법현(337–422)은 5세기, 현장법사(602–664)는 7세기, 의정(義淨 635–713)법사는 8세기, 송운(宋雲)법사는 6세기에 인도를 방문했는데, 에프탈이라고 하는 백색 훈족은 5세기 경, 서북인도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인도의 서북부는 불교가 왕성할 때인데, 이란계 유목민족인 훈족은 이 지역에 강타를 안겨서 불교의 확장을 주춤하게 했다. 북위(北魏)의 송운(宋雲)법사는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인도의 에프탈은 비록 패하긴 했지만, 5세기 중반에는 마가다까지 진격했고, 서북부로 퇴각한 것이다. 두 번째는 팔라왕조시대에 무슬림들의 점진적인 공격을 받고 불교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게다가 몽골 티무르와 무갈 왕조와 수피즘의 영향 등으로 불교는 점점 인도 땅에서 멀어져 갔다. 그나마 고대부터 불교의 맥이 유지되고 있는 동(東) 벵갈(방글라데시) 지역과 네팔을 제외하고서는 인도 아 대륙은 오랫동안 불교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실론 출신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출현하신 것이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보드 가야에 성지순례 갔다가 대탑(대각사)이 힌두 시바파의 승려가 관리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고, 실론에 돌아오자마자 대각회를 설립하고 이듬해인 1892년에 당시 브리티시 인디아의 수도였던 콜카타(당시는 캘커타)에 본부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보드 가야 대각사 관리권 찾기에 시동을 건 것이다.

보드 가야 대각사는 팔라 왕조를 무너뜨린 힌두 왕조인 세나 왕조(11-12세기)가 대체하면서 인도 북동부를 휩쓸었고, 그 다음에는 투르크계 무슬림의 한 장군에 의해서 파손된다. 그리고 부근에는 힌두 사원이 건립하게 되었다. 왕조를 잘못 만나면 아무리 강성했던 종교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인도불교의 쇠퇴는 이런 외부 요인도 있었지만, 사실은 불교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종교가 이미 되어가고 있었다. 승가 내부의 타락과 민중의 외면이 점점 심화되어가는 차에, 외부의 공격을 받아서 결정타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후 대각사도 오랜 침묵 속에 묻혀버린 역사의 유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는 파손된 대각사를 보수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브리티시 인디아 정부는 1880년대 고고학자 알렉산더 컨닝함 경에게 이 지역을 발굴하도록 했다. 에드윈 아널드 경은 1885년 이 지역을 방문하고 부다가야(보드 가야)의 비참함을 주목케 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와 에드윈 아널드 경은 의기투합하여 불교도에 의한 대각사의 관리권 이양을 주장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운동의 결실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임종하기 전 비구계를 받고, 스님 신분으로 입적하고 그의 사후에 1949년 힌두 승려들의 손에서 관리위원회를 구성해서 불교 승려가 참여하게 되고, 위원장은 불교 승려가 맡도록 비하라 주 정부에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대각회는 그 후 사르나트(녹야원) 산치 럭나우 오리사 뉴델리 첸나이 라자스탄 방갈로르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사원을 세워서 운영을 하면서 성지보호와 복지 교육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보드 가야(Bodh Gaya)는 인도 비하르 주 가야 지역에 있는 타운으로 대각사(Mahabodhi Temple)가 있는 곳이다. 보드는 깨달음(覺), 가야는 몸체(身)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각신(覺身)이란 뜻이다. 각신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한다. ‘깨달은 곳’이란 의미이다. 부처님이 되기 전에,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처음 왕사성에 갔다가 나중에는 전정각산(前正覺山)에서 6년간 고행하다가 피골이 상접(相接)할 정도로 깡마른 체구를 이끌고 마을로 내려와서 우유죽을 공양 받고 기운을 차려서, 바로 이 대각사가 있는 지점으로 왔다. 당시에는 이곳이 강둑(네란자라 강)에서 그리 멀지 않는 우루벨라 라는 곳으로 보리수나무들이 있는 숲이었다. 고오타마 싯다르타는 이 보리수 아래 자리(金剛寶座)를 잡고 명상에 들었다. 당시 출가한 무소유의 사문들은 동굴이나 나무 아래서 기거하면서 수행하는 것이 수행자들의 유행이었다. 결사항전의 각오로 용맹정진한 결과, 얼마가지 않아서 대각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 때가 기원전 528년(탄생 BC563)이다. 250년 후인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이 부처님의 대각(大覺)을 기념해서 이곳을 방문하고 절을 세웠던 것이다. 중국의 법현 법사는 5세기에 현장 법사는 7세기에 이곳 대각사 성지를 순례했다. 13세기 투르크계 무슬림 군대가 공격하여 파손한 후에 18세기 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역사적인 불교성지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 의해서 주목을 받아 세계에 알려져서 많은 불교도들이 참배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신심과 열성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임종하기 전, 비구계를 받고 비구가 되었고, 평생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세계는 부처님에게 빚졌다 The World's Debt to Buddha》는 1893년에 저술했는데, 원래 이 책은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종교의회(Parliament of World Religions)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정리하고 더 첨가해서 엮은 책이다. 그는 세계종교의회에서 행한 이 연설로 일약 유명인사기 되었는데,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에게 어필한 내용이었다. 세계종교의회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종교 간의 대화를 통한 상호이해를 목적으로 처음 열린 모임이다. 이 모임은 매 5년마다 세계 각국을 돌면서 개최되고 있다. 창립 100주년이 되는 19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바 있다. 2009년 대회는 12월 9일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될 때, 필자도 참가한 바 있다.

사진6: 1893년 9월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 1차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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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좌에서 두 번째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 옆은 힌두 구루 스와미 비베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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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 2009년 12월 9일에 열린 세계종교회의, 호주 멜버른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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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불교의 건설적인 낙관주의 The Constructive Optimism of Buddhism》(1915)는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불교는 비관적, 허무주의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선전을 반박하는 내용의 책이다.《부처님의 메시지Message of the Buddha 》(1925)는 안티 기독교적인 내용으로써, 실론식민지 관료와 기독교 선교사들을 겨냥해서 프로테스탄트적인 불교를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저술된 책이다.

사진9:멜버른에 있는 베트남사원 광명사 낙성식에 참석한 불교대표단 필자(중앙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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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 세계종교회의 마지막 날 평화행진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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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관점에서 본 진화 Evolution from the Standpoint of Buddhism》(1926)는 다윈의 진화론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불교의 과학성을 설파한 것으로 《디가니까야(長部)》의 《아가나 경(Aggañña Sutta 起世因本經)》의 우주론과 인간기원에 관한 내용을 써서 불교의 과학성괴 진화론의 관점을 소개하여 서구인들의 주목을 환기시켰다.

이제 정리하자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불교 개혁가이면서 실론불교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대각회를 설립해서 불교성지를 보호하고, 서구에 불교를 전파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말년에 그는 구족계를 받고 비구 데와미따 다르마팔라로 승가에 출가해서 비구로서 입적했다.

실론(스리랑카) 불교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를 소개하면서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실론 출신 비구나 학자들의 영어 실력이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이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어실력도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사실, 세계불교모임이나 학회 등에서 만나는 스리랑카 분들은 대체로 영어에 능통하다. 다만 발음과 악센트가 좀 강할 뿐이다. 우리가 미국식 영어에 익숙하다보니 브리티시 정통 영어에 기반을 둔 인도 실론 파키스탄 등, 인도 권과 중동 동남아 권 등의 사람들의 영어에 대해서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게 되는데, 사실은 이 분들의 영어까지도 알아듣고 의사소통이 되어야 영어 좀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분들이 한국인의 미국식 영어를 듣다보면 그들은 또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양쪽을 다 커버해야 한다. 말이 통해야 의사가 통하는 것이다.

실론에서 영어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681년부터이다. 실론은 1948년에 브리티시에서 독립하고 난후, 영어는 더 이상 공용어가 될 수 없었다. 250년간 공용어로 사용된 영어가 당장 공용어가 아니라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인도나 파키스탄과는 달리 스리랑카는 독립이후, 영어 사용에 대해서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국민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듯했다. 브리티시 식민지의 공용어로서의 영어가 아니라 제2외국어로서의 영어로 인식하고 영어사용을 수용하고 더욱 장려한다는 느낌이다. 스리랑카 불교 권으로 눈을 돌려보자. 세계불교도우의회가 스리랑카에서 1950년 5월에 창립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불교 엘리트 들은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우선 영어에 능통한 분들이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세계불교도우의회의 창립 주역인 구나팔라 삐야세나 말라라세케라(Gunapala Piyasena Malalasekera,
1899–1973)박사 같은 분들이다. 이 분은 교수와 대사를 역임한 석학인데, 그가 편찬한《빨리어고유명사사전Dictionary of Pali Proper Names.》I.II는 너무나 유명한 역작이다.《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쳤나 What The Buddha Taught》(1959)의 저자이신 비구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7–1997) 박사 또한 영어 불어에 능통한 석학이다.

이치란 박사
해동경전어아카데미원장
WFB 세계불교대학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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