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국 12년(85년-96년) 가족이민생활 속에서 두 딸의 성장을 회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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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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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6) 미국 12년(85년-96년) 가족이민생활 속에서 두 딸의 성장을 회고해 본다.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09, (월) 11:04 am

누구든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은 대체로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85년 4월 나의 딸 둘은 중학1년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이곳 LA 한인타운 4가와 호바트에 있는 첫 이주 아파트로 오자마자 전학된 것은 중학1학년 2학기, 초등학교 4학년 2학년이 되어 등교하게 된다. 4학년짜리 작은 아이는 한영사전을 찾아 영어를 익히던 중에 사전에 나오는 한글낱말부터 이해력이 부족한 상태라 매우 힘들어 했다. 큰 아이는 어려운 한글낱말도 제법 알고 있었던 터라 진도가 빨랐다. 대신 영어코스 학력어휘 습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큰아이는 곧잘 한국어 통역을 해낸다. 반면 작은 아이는 영어로는 통하지만 한국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난감해 한다. 이러면서 1.5세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갓 이민 길에 왔던 당시 85년 5월(왼편-작은아이) 87년5월(오른편) 두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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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의 큰 아이는 중학 2학년생으로써, 아빠를 돕겠다고 사진식자 한글식자를 해주던 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작은 아이는 장거리 통학 스쿨버스로 1시간 정도를 시달리며 중학시절을 보내야 했다. 차멀미 때문에 무척 고통을 감수하며 견뎌온 것을 잊지 못하고 있다.

86년 9월 불교신문 미주서부판 발행을 중단하고 난뒤, 도안스님과 나는 관음사 새건물 구입에 대한 현장확인을 하게 되었다. 당시 세라노-관음사 독립가옥을 27만불에 팔기로 하고 새건물(120만불에-40만불 지진보강공사 예상경비를 제하면 80만불(오너케리)에 20만불 다운페이, 나머지 수속경비 7만불 예정)을 사드리게 된 것이다. 86년 11월부터 이전하게 되어, 나도 고려각 식자기 2대를 호바트아파트에 옮겨놓고, 다시 새건물 장소에 옮겨 불교시보(88년부터 다블로이트판 32면 착수) 발행을 계속해 나갔던 때다.

87년 10월 25일 나는 인천의 큰누님댁에 계시던 어머님(당시77세)을 미국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87년 여름에 5가와 그래머시에 있는 콘도(15만불-다운2만5천불)를 구입하기 위해 미리 신청해 놓고, 에스크로가 끝나 87년 11월에 가서야 콘도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아래 사진은 큰아이(김우영) 87년 6월 18일 중학졸업 때 모습(중학 교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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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래는 87년 9월 16일 교황바오로 2세 미국방문기념 종교지도자 초청간담회에 도안스님이 참석하게 되어, 도안스님의 인사말을 통역하기 위해 당시 큰 딸이 스님을 돕던 때, 당시 큰딸 김우영은 LA하이스쿨 1학년 이었다.(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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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이 김우경은 85년 6월까지-4학년, 86년 6월까지-5학년, 87년 6월까지-6학년, 88년6월까지-7학년(중1), 89년 6월까지-8학년(아래 사진-14살 중2 폴토라 중학졸업식)을 통학버스로 다니면서 이민 4년 3개월만에 중학졸업을 한다.<아래 왼편 사진은 엄마와 함께 찍은 졸업기념사진> 그리고 89년 9월부터 90년 6월까지 9학년(리시다), 90년 9월부터 93년 6월까지는 10학년-12학년(LA하이) 편제로 고등학교 학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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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은 어머님을 모시고 콘도 집 입구 앞에서 단란한 가족이 기념촬영 했던 89년 여름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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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김우영)이 90년 6월 고3 졸업(아래 사진)을 하고, 90년 9월부터 어바인대학(기숙사 기거 2년)을 다닐 때다.
그러나 큰딸은 이제 2년만 더 다니면 대학을 졸업하게 될 터인데, 92년 가을(3학년 신학기)부터는 대학을 휴학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때다. 부모 된 나로선 더 이상 학업 뒷받침을 못해준 것에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학자금융자를 받아 졸업을 하도록 설득해 보았지만, 대학졸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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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90년 10월에 인쇄소를 운영하겠다고 콘도를 저당하고 추가융자를 했던 것이 페이먼트 감당이 가중되어, 여러 가지로 어려웠던 때였다. 애들 엄마도 어려운 이민생활 극복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온갖 잡다한 허드레 일을 6년간 견디다 보니, 심한 몸살로 결국 90년 10월부터 92년 여름까지는 갱년기 장애까지 겹쳐 몸마저 누어있던 때였다.

91년도 봄, 아이들 엄마는 오직 불심과 주변 인연공덕에 감사하며 심신을 스스로 극기해서 심한 고통 속의 병세를 다스려 회복에 들었고, 다만 바깥출입만 자유롭지 못하고 있을 때, 인천에 있는 아이들 큰 고모와 막내 고모가 미국을 방문한다. 병석에서 일어난 올케 회복을 위해 한달간 보살펴 주고 들어갔다.(아래 사진-LA달마사와 우정의 종각에서 큰 아이(대학1년 2학기 때)와 작은 아이(고1, 2학기)가 고모들과 함께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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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92년도 여름 초에 작은 누나가 매부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그때 아이들 엄마는 허약한 몸을 가누며 겨우 병세에서 몸을 털고 조금씩 바깥출입을 시작할 때였다. 그때 작은 누나는 어머님을 한국에 모시고 들어가 어머님 마지막 여생은 자기가 모시고 못해온 효행을 하고 싶어 한다. 어머님이 한국가서 사시겠다면 그때가서 그렇게 하자고 화답하고, 지금의 내 처지는 아이들 엄마나 한국가서 요양을 좀 하고 왔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결국 작은 누나가 수속을 해서 92년 6월 28일에 함께 들어가 주었던 것이다.

<아래 사진- 왼편은 스님과 어머니를 모시고 가운데 작은 누나가 아이들과 함께 기념으로 남긴 사진. 그리고 오른편은 그때 병석에서 겨우 일어나 작은 아이를 보살피던 때 모습, 이런 상태에서 고국 친정에 들려 3개월 정도 머물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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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작은누나의 도움으로 애들 엄마는 7년만에 고국의 친정을 들리게 된 것이었고, 3개월 정도 머물다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오게 될 때도 다시 작은 누나가 함께 동행 3개월만에 다시 들어와 준 것이다. 이 은공을 어찌 혈육의 고마움으로만 생각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잊지 않고 늘 간직해두는 혈육 간의 은혜들은 언제나 다 갚고 훌훌 자유로운 마음이 될는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같이 세월은 흐르고 아이들은 성장하며 어른들은 나이만 는다. 92년 아이들 엄마가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 8월 경 갑자기 82세가 된 할머니는 노환 중에 위급한 장염이 생긴 듯 했다. 앰블란스를 타고 시다스병원으로 옮겨간 후 보름정도 치료를 받고 완쾌되었지만, 항상 옆에서 노모를 보살필 사람이 없으면 불안하기 그지없는 법, 그렇다고 이제와서 노모가 거동이 어렵게 되어 부자유스럽게 되면 그때 가서 방치할 수 없으니, 남들처럼 요양병원으로 보내야만 하겠는가. 나의 마음 한구석은 이로 인해 착잡하기만 했다.

92년 10월 초, 3개월만에 올케(애들 엄마)와 함께 다시 들어온 작은누나는 아이들 할머니를 한국에서 여생을 마치도록 하려는 작은누나의 의지를 굳게 밝히며, 어머님께 효심의 뜻을 관철하여 승낙을 얻어내려고 다시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7일간 머물다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93년을 맞으면서 내가 어머님을 미국으로 모신지 6년째 접어들었다. 93년 5월 경 스님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어머님을 모시고 나는 나로서의 결단의 뜻을 알린 것이다.

“어머님!! 이제 작은 누나도 끝 순서로 어머님을 모시겠다고 합니다. 작은누나가 한국에서 어머님을 모시겠다고 했을 때, 저로선 처음은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님의 마음을 살피면서 작은 누나의 효심을 받으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에 계시다가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이 아들이 어머님 유해는 모시고 들어와서 이곳의 아이들을 위해 어머님의 묘지는 이곳에 모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이 늘 어머님 안부를 전화로 확인할 것입니다. 내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작은 누나보다 편하게 해드릴 수 없게 된 처지라서, 저로서도 작은누나한테 의탁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누나가 옆에서 어머님 온갖 수발을 나보다는 잘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다 어머님이 집에 혼자 있게 될 때는 매우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이 태산 같아요!!”

이처럼 말씀을 어머님께 드리고는 있었지만, 아들 곁에서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는 어머님의 마음을 어찌 아들인 내가 모르랴!! 부모를 모신다고 해서 효행만은 아니다. 자칫 노모를 혼자 있게 방치하게 되면 그것이 불효가 되기 때문, 그 점을 작은 누나에게 누누이 다짐했던 나였다. 그래서 나로서도 어머님이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작은 누나 곁에 가 계시기를 원한다고 했더니, 간단히 “그러마.”하시며 승낙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작은누나와 작은매부에게 어머님을 모시는데 후회함이 없도록 다시 다짐의 전화로 확답을 듣고, 93년 9월 10일 스님께서 본국 해외평통자문위원 회의 참석을 위해 서울을 다녀오시는 편에 어머님을 모시고 갈 것이니, 인천공항에서 모셔가도록 작은누나에게 사전 통보를 해두었다.

어머님이 한국으로 가시기 전에 아이들 엄마는 그간에 어머님을 위해 마음먹고 해드리지 못했던 아쉬움을 나누고자 파크에 여러 차례 모시고 가서 가족이 함께 음식을 해먹으며 맑은 공기에 정취를 나눈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렇게 해서, 어머님이 인천 작은누나집으로 가셨고, 그때 떠나시면서 하시던 말씀, “애들 엄마한테 잘 하거라.” 당부하시던 말씀!!, 지금까지도 나의 귓전을 맴돈다.

그러고 나서, 이럭저럭 94년도까지 보내고 보니, 이제 큰아이는 10년 세월에 22살이 되었고, 작은 아이는 19살이 된 것이다. 이제부터 이 아이들은 스스로의 길로 사회생활을 통해 살아가야할 나이가 되어버린 셈이다. 부모가 뚜렷하게 해준 것도 없이 세월만 보내온듯하여 마음 한구석 미안함만 가득할 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성장해서 부모를 끔찍이 생각하는 성년이 된 모습을 보니, 참으로 이것이 인생이며, 그 보람이라 할까!!

<어머님은 96년 10월 9일 한국에서 입적하셨고, 장례(인천에서는 작은누나와 작은매부의 효행이 널리 알려졌던 때라 엄청난 조문 인파를 이룸)를 마치고 어머님 유해는 이곳으로 모시고 와 로스힐메모리알팍 불교묘지에 모시고 있다.>

*다음 편은 87년 이후 96년까지의 관음사와 관련된 나의 불교활동의 이모저모를 간추려 “미국에서-이민불교 활로모색” 연재를 마감하고자 한다.

<2016.8.24>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어머님을 모시고 아이들 이민생활 30-20년전을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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