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처음엔 고려원과 함께 고려각을 열다(나의 이민생활 첫출발)

BUTTON_POST_REPLY
lomerica
전체글COLON 427
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2) 처음엔 고려원과 함께 고려각을 열다(나의 이민생활 첫출발)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09, (월) 8:06 am

고려원과 함께 고려각을 열다(나의 이민생활 첫출발)

한인타운 웨스턴 5가 칼스쥬니어 옆편 건물에 83년 11월에 고려각을 열다.
korealiterary.jpg
korealiterary.jpg (176.67 KiB) 576 번째 조회
83년 5월은 철우스님의 도움으로 나는 서부에서 동부로 미 대륙횡단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때 나는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을 뵙게 되었고, 그 때 동부를 방문 중이었던 월주스님과 함께 동부를 여행하게 된 인연이 되었고, 그래서 디트로이트를 거치고 다시 시카고(불타사)까지 철우스님이 동행하였고, 시카고에서 LA까지는 비행기로 월주스님과 나만 되돌아오게 된 일정이었다.

이미 나의 영주권 신청은 4월 중순께 LA관음사 분원-라스베가스 관음사 상임법사로 해놓고, LA와 라스베가스를 왕래하며, 그리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때였다. 수속은 한국으로 신원조회를 하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이민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난 뒤, 나는 주로 라스베가스 관음사는 법회때만 들리기로 하고, 주로 LA 관음사에 머물던 때다. 영주권 신청 6개월도 안된 상태에서 나는 83년 10월초 영주권을 받게 되어, 한국에 있는 가족을 위한 이민신청은 곧바로 LA이민국을 통해 하게 되었고, 그래서 가족 모두가 미국에 이민하게 된 것은 신청 후 1년 정도 걸려 완료되어, 한국의 가산을 정리한 후 85년 4월에 이르러서야 가족이 함께 살게 된 가족이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큰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고,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2년간 떨어져 살아왔던 것이었다.

물론 나는 80년도 10월 미국을 다녀왔고, 그리고 그 당시 국제불교도협의회 일을 보던 때여서 한국의 미대사관에서 취급해오던 이민정보를 나의 신상에 비춰 적합성(76년 취득의 재가포교사로서 7년경력의 영주권신청가능)을 확실하게 파악한 후의 후속 절차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수월하게 해결된 셈이었다.

83년 4월 라스베가스에서 영주권 신청을 하고 난 뒤, 동부여행을 마치고 LA로 돌아와 있을 때,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로 들어온, 고려원출판사 미주총판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은 외조카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외조카를 만나 사정을 들어본 결과 지사 거점마련을 물색 중이라 하기에 이왕이면 LA에 설치해서 공간을 나눠서 렌트비를 분담하면 나도 도움이 되겠다고 말했더니, 그렇게 하자고 합의가 되어, 고려원서점과 고려각을 한 장소에 설비하게 된 것이었다.(사진 위)

그래서 고려각 개관을 위한 의론을 도안스님과 하게 되었다. 이때가 도안스님이 83년 6월 제2기 평통정책자문회의 전체회의 개최 참석차 고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였다. 스님은 그때까지 불교문화회관 건립기금조성을 위해 모아온 서화전시회 작품을 가지고 미 전역을 돌며 판매하고자 했고, 나는 이를 만류한 것이다. 순회전시회를 통해 자칫하면 기금마련이 되지 못하고, 순회전시회 장소 및 준비경비로 오히려 빚을 지게 될 경우를 우려했던 것이다. 달리 큰 행사가 준비된 장소에서 곁들여 하는 전시회라고 해도 경비는 운반경비 등 꽤 비용이 나는 법인데 전시만을 위한 준비는 길가에 돈을 뿌리는 결과밖에 안된다고 적극 만류했었기 때문에 순회전시회 모금사업에 아쉬움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대신 상설 전시관으로 고려각 장소를 사용하라고 제의를 하게 되었다. 마침 물색한 상점공간이 1500스케어피트 였기에 내부를 3등분으로 구간을 나누어 입구 창쪽엔 2곳의 쇼케이스로 구분하여 한쪽은 고려원에서 사용하고, 한쪽은 관음사 상설 전시대(벽면-전시)로 하며, 안쪽으로 칸막이를 조그맣게 두어 사진식자기 2대 작업공간을 구분한 것이었다. 건물 천장이 높은 공간이라 사진식자기 작업공간 위에 다락채를 만들어 조그만 사무실로 겸해 사용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렌트비 월 1500불을 3등분하여 500불씩 분담하기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계획은 관음사에서 상설전시장을 갖추게 됨으로 인해 전체구간 내부설비비용(목재)은 관음사에서 부담하게 되었고, 목공은 내가 직접 맡아 하게 되어 설비를 완료했던 것이다. 내부설비공사는 3개월 정도 걸려 완료했고, 8월부터 시작해서 10월말에 가서야 내부공사가 완료되었다.

고려원은 10월부터 서적을 들여오기 시작, 설치대 진열을 해나갔고, 관음사측도 10월부터 상설전시 큰 그림을 설치했고, 그 외 도자기 등 진열품을 갖추어 개관준비를 해나갔다. 나는 안쪽에 사진식자기 2대를 구입해서 설비했는데, 1대는 월부로 분할하기로 하며, 일정기간 식자기 사용기술 습득을 전수받기로 하고, 이전부터의 거래처를 그대로 유지하며 넘겨받기로 한 것이었고, 1대는 2번에 걸쳐 대금(7,000불)을 반씩 나눠 지불을 완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사진식자기로 한인타운내 일반영업을 하는 곳은 오직 상미식자였고, 나는 고려식자 상호로 영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 당시 미주한국일보 발행도 모든 편집을 자체 사진식자기로 하던 때였고, 중앙일보는 아직 발행되지 않던 때였다. 동아일보는 나오다가 중지된 때였고, 그리고 한인사회에 유일한 주간지 선데이저널과 비즈니스타임즈가 나오고 있었다. 선데이저널과 비즈니스타임즈가 고려식자에 사진식자를 주문해서 편집하던 때였다.

이리하여 관음사에서는 1983년 11월 6일부터 불교문화회관 건립기금조성 제2차 서화전시회를 고려각(사진식자소 대표:김안수)개관기념으로 10일간 개최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관음사는 처음으로 사원외곽(4165 W. 5th St.에 위치한 고려각-바깥상점)을 임대하여 상설전시장으로 신도-자원봉사자에 의해 모금사업을 전개하는 운영관리를 시도하게 된 것이었다.

또 이때부터 관음사는 고려식자의 도움으로 일요정기법회 안내지 관음법보(레터지크기)를 주보로 편집, 사찰로서는 유일하게 자체 복사기를 두고 발행 배포했다. 그 기여도는 도안스님이 살아계실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관음사 발자취의 역사를 살피는데 중요한 증빙자료가 되었고 20년사, 30년사 연감을 만드는데도 기여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나의 생각은 나의 이민생활의 정착을 통해서 앞으로 펴보려는 한국불교권 미주확대 불교운동에 바람직하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계산에서 나의 이민생활 첫발의 터전을 잡은 것이었지만, 결국은 당시 미국현지 교포사회 실정에 너무나도 어두웠던 나에게는 크게 빗나가고 있었다. 하여튼 나는 고려식자를 통해 가족이민 생활기반을 꾸리면서, 그리고 한국에서 몸담아 열중하다 중지한 국제불교도협의회 기관지 국제불교회보 형태의 불교신문 발행을 다시 이곳에서 해볼 생각으로 그 기반을 갖추어 보자는 속셈이었다. 이러한 뜻을 도안스님도 크게 환영했던 터라 그때까지는 관음사를 배경으로 한 합심의 노력을 강구했던 때였다.

그러나 고려각과 함께 자리를 잡았던 고려원이 점포자리를 비우고 다른 곳을 찾아 독자점포를 운영하겠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었다. 고려원측으로는 자리가 비좁다는 생각도 들었겠지만, 고려원자리까지 점포공간을 관음사가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나로서도 겨우 식자소를 꾸리고 안간힘을 쏟던 입장이어서 달리 대책이 서질 않고 있던 입장이었다. 더구나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한인 기독교세가 강세인 당시 이곳 한인사회에서 고객을 확보하려던 고려원으로서는 불교이미지가 돋보이는 관음사 상설전시장 입구를 통한 통로사용이 고려원 이미지 부각에 많은 불편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고려원은 이사를 했고, 관음사에서 그 공간까지 확장사용을 하게 됨으로 도안스님으로선 큰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러니 스님과 나로선 하는데 까지 버티어볼 작정으로 억지춘향격으로 철수를 못하고,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85년 가을까지 만2년을 버티어오다가 결국 내가 먼저 이전함으로 철수한 곳이 되었다.

그러니까 출발은 고려원과 함께 해서 출판물을 위주로 한 상점을 꾸릴 것으로 착안한 계획이었지만 결국은 관음사 상설전시장 운영체제가 골격이 됨으로 부득이 신도님들의 자원봉사가 필요해졌고, 그래서 초기엔 신도회 총무 강금상화 보살이 83년 11월 개관 후 2개월 정도 무료봉사 상점관리를 했고, 84년은 고려식자소에 사람이 고용됨으로 바깥 상점관리를 도와오다가, 85년 3월부터는 상점관리를 해줄 수 있는 사정이 어렵게 되어 철수 직전까지 뒤이어 김문권, 염기영, 김상진, 김재우, 김경희 등 관음사 신도님들이 돌아가며 일일점원으로 수고를 한 기록이 관음사 20년사에 나타나 있다.

그렇더라도 그때 1984년 8월 고려각(주소)에서 불교문서포교를 집약 주동해 보려는 의지를 갖고 그리고 불교배경의 청소년사회교육과 불교노인 복지를 위한 조력업무 프로그램을 추진하고자 사회복지 비영리법인 불교기관 한미불교봉사회를 설립하게 되어, 현재까지 존속해 오고 있는 한미불교봉사회 설립주소가 4165 W. 5th St., LA CA 90020 번지로 되어 있게 된 연유다. 그리고 그때 84년 가을 김문권거사 시조집 발간이 고려식자를 통해 편집되어 관음사 개원 10주년 기념 신앙게송집으로 발간을 하게 되어 신도들에게 배포되기도 했다.

한편 고려식자소는 철수 이전까지 85년은 내부 뒤편 다락 2층 사무실을 비즈니스타임스(전달문)가 사용하던 공간이 되기도 했고, 그때 나는 그곳에서 작가 한재수(영화평론) 법사를 처음 만나게된 인연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추기:<이 기간에 있어던 나의 일기>
83.06.01 제2기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전체회의 개최 (83년5월25일 도안스님 한국귀국)
84년 여름엔 큰매부가 미국 84올림픽때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해이기도 하다.
85년 4월은 전두환 대통령 미국방문 때에, 수행했던 최일랑(청와대 출입사진기자) 친구가 잠시 시간을 내서 나와 만났던 때였다.
85.06.05 제3기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전체회의 개최 (85.6.2 2주간 도안스님 한국귀국)
도안스님 귀사 후, 고려각을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통보하고, 내가 이전할 것임을 알림.

전두환대통령은 1981년 1월과 1985년 4월, 2차례에 걸쳐서 미국을 방문하고,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미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하여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논의로 불편했던 양국 간의 관계를 해소하고, 안보·외교 등 다방면에서 새로운 동반자 우호동맹관계를 긴밀히 하였다.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백지화하고, 한국군의 방위력 증강을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공약하였다. 또한 한·미 양국 정상은 중단되었던 양국간 안보·경제 등 제반 정례협의회의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다.

<2016.7.12.> 30년전을 회고하며,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BUTTON_POST_REPLY

다시 돌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