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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1-09, (월) 7:54 am 

가입일: 2016-11-29, (화) 5:42 am
전체글: 427
가) 나는 83년 1월 10일 신동기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미국을 향한 새 길을 찾는다.

막상 친구 신동기와 함께 83년 1월 10일, 미국생활을 펼쳐 나갈 각오로 탑승한 항공은 샌프란시스코로 직항했다. 한낮인 듯 했다. 친구 집으로 안내되어 오클랜드에 도착하여 간편한 짐을 풀어놓고 난 시간이 저녁해질 무렵인 듯 했다. 우선 체육관 도장시설을 보게 되었고 안쪽으로 숙소를 겸해 사용하고 있던 공간이었다. 그때 친구 부인은 아직 한국에 머물고 있었고, 부인이 들어오면 샌프란시스코 쪽 아파트로 살림터를 옮길 계획이었다. 그래서 잠시 부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체육관에 기거하고 있다 했다. 친구의 생각은 체육관을 이용한 불교사원과 같은 용도를 겸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듯하다. 체육관 클라스가 대체로 방과후 시간이므로 그 외는 불교활동을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체육관 안쪽에 있는 1, 2층 시설을 주거요사체로 쓰고, 바깥 체육관은 집회장소를 겸할 수 있어 어찌 보면 안성맞춤인 듯 보인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는 여래사가 설조스님에 의해 개원되어 있었다. 설조스님은 80년 법난 당시 LA 관음사와 고려사에 잠시 머물고 있다가 그때에 계속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이 지역 한인불자들을 위해 새로이 전법의 터를 확충하고 있을 때였다.

내 꼴이 무어란 말이냐, 뚜렷하게 보장된 일도 없는데, 그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무턱대고 그저 옮겨 보자던 나, 참으로 한심했다. 친구말대로 오클랜드쪽에 내나름의 불교회관을 개척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LA 관음사 도안스님이 환영할 일이 아니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는 자동차로 30, 40분 거리의 위치다. 게다가 한인불자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밀집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의 예측은 전혀 나로선 감당할 수 없는 처지로 나와는 빗나가 있었다. 더구나 중앙일보 지역판을 해보자던 지역보급소를 맡고 있던 분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질 않은 상태였다.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한달가량이 지났지만, 세심히 점검결과는 친구의 능력 밖의 일로 모두가 사라진 꿈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도안스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어림도 없는 일 꾸미지 말고 LA로 건너오라 말씀하신다.

<사진은 데스 벨리>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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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d2f4fd704427aa9c5ca547d9545b8f9.jpg [ 63.71 KiB | 320 번째 조회 ]

나) 영주권 신청은 결국 LA관음사 분원-라스베가스 관음사에서 하게 되었다.

83년 2월 초 LA로 와서 세라노 관음사에 잠시 머물다가, 곧바로 도안스님 안내로 라스베가스 관음사로 가서 법회를 돕게 되었다. 라스베가스 관음사는 1982년 12월 4일 최초의 관음사 분원을 라스베가스에 설치하고 개원법회를 겸한 봉불식을 30여명의 신도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원축하행사를 거행한바 있고, 그때부터 라스베가스 관음사에는 지현스님이 아틀란트에서 옮겨 이곳 주지로 부임해 있었다. 나와는 녹야원에서부터 오랜 기간 함께 지내왔던 동암스님 문중으로, 법난 직후 내가 미국으로 안내하여 도안스님에게 부탁해서 아틀란트에 가있었는데, 내가 미국에 들어와 보니 다시 아틀란트에서 라스베가스로 옮겨와 만나게 된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지현스님의 도움을 받으며 2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2개월간 약 15명 안팎의 신도들이 운집했던 라스베가스 일요법회의 설법을 맡아 상임법사로서 반야심경강좌를 맡아 했고, 그때 나는 4월 중순께 그곳 신도회장 주선으로 라스베가스 이민국을 통해 라스베가스 관음사 상임법사로 영주권 신청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나의 영주권 신청의 통역을 맡아 준 사람은 내가 청소년교화연합회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목포 불교학생회 출신인 김상균이 마침 유학생 신분으로 LA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민신청서류를 이민변호사를 거치지 않고, 내가 직접 LA에서 이민서류작성 대서실(피터김)을 찾아가 구술 기재하고 증빙서류를 갖춰, 직접 이민국에 출석하여 통역(김상균)을 통해 제출했던 것인데, 신청서류 증빙으로 나의 여권(미국, 일본 비자 증명), 성직자 여행 할인카드, 조계종 직할교구 포교사 임명장, 법상종 사회부장 신분증, 국제불교협의회 임직관련서류 등 일체를 함께 이민국에 제출케 되어, 그때 내가 돌려받은 것은 없고 다만 이민신청 제출서류 접수증만 받았다. 그리고 거주지(라스베가스 관음사)로 통지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신원조회를 하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이민신청 서류를 제출하고서, 라스베가스 관음사는 지현스님에게 맡기고 나는 잠시 미국여행일정을 갖고 싶어, LA에서 라스베가스까지 움직였던 김상균 승용차에 다시 단 둘이 탑승한 채 그 길로 LA관음사로 향했다. LA로 돌아오는 길에 죽음의 계곡이라는 데스 벨리(Death Valley)를 들려 고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미대륙 가운데 황야로 덮였던 미서부지역의 또 다른 모습을 들춰 보이는 자연의 신비로운 모습을 체감해 볼 수 있었다.

다) 철우스님 배려로 서부에서 동부까지 7일간에 걸친 미대륙 횡단을 하게 되다.

영주권 신청은 LA관음사 분원-라스베가스 관음사로 해놓고, LA와 라스베가스를 왕래하며 LA관음사에 다시 머물고 있을 때, 철우스님(환속 전)이 시카코 불타사에 있다가 LA관음사에 5월 초에 왔다. 당시 시카코 불타사에는 오홍선스님이 주석하셨는데, 철우스님과 홍선스님과는 사형사제간이다. 그리고 철우스님과 나는 64년도부터 줄곧 녹야원에서 함께 있었던 인연으로 꽤 친숙한 사이였다. 미국에서 다시 만난 인연이 되고 보니 나의 고독한 심정의 처지를 허물없이 대해줄 수 있는 스님이기도 했다. 그때 철우스님이 하는 말이 지금 아니면 미국여행 제대로 할 시기가 없을 거라며, LA에서 뉴욕까지 자동차로 대륙횡단을 해보자고 한 것이다. 결국, 철우스님과 나는 자동차로 LA에서 출발 중부를 가로질러 북상하면서 뉴욕까지 가는데 운전을 교대하며 한사람은 차에서 잠을 붙이기도 하고 계속 달려 7일정도 걸려 뉴욕에 도착된 듯 했다. 지금 나로선 그때에 횡단한 정확한 도로명은 기억을 못한다. 텍사스지역인 듯 생각되는데 우박이 엄청나게 쏟아져 갈피를 못 잡고 차안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우박이 멈추기를 기다리던 때가 기억난다. 모든 경비를 철우스님이 감당하고 나는 신세만 지는 입장이었다. 그리고서 뉴욕 원각사에 도착하고 보니, 월주스님께서 와 계셨다. 83년 5월은 미국에서 철우스님과의 대륙횡단으로 그때 나는 뉴욕 원각사 법안스님을 뵐 수 있었고, 그 뒤로 월주스님과도 동부지역을 함께 여행하게 된 인연이 되었다. 디트로이트를 거치고 다시 시카고(불타사)까지는 철우스님이 동행하였고, 시카고에서 LA까지는 비행기로 월주스님과 나만 되돌아오게 된 일정이었다. 시카고에선 홍선스님이 베풀어주신 안내로 월주스님과 함께 미시간 호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LA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의 그때의 월주스님과의 대담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다.

라) 월주스님과 비행기 안에서의 대담,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 속에 남아

월주스님과 나는 83년 5월 시카고 불타사 홍선스님의 안내로 미시간 호수를 관광했다.
첨부파일:
Untitled-1.jpg
Untitled-1.jpg [ 45.31 KiB | 320 번째 조회 ]


비행기에 몸을 싣고 시카고에서 LA에 오던 중 기내에서 월주스님과 나누던 이야기를 적어본다.

-스님, 80년 법난 때, 저는 미국에 잠시 와 있었지만 한국에 나가서 그 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스님께서 금전에는 제일 깨끗한 분으로 알려져 있더군요.-

“아, 그래요!. 나야 뭐 별로 금전에 대한 취급은 안하고 산 탓이겠죠.”

-지금까지 불교계는 호국이란 이름하에 무조건 정권에 부침한 인상이었는데, 스님께선 그때 당시 총무원장으로서의 처신은 단호하게 맞서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요.-

“불교가 타율적 사회정화 대상이 된다면 그건 말이 안 되죠. 불교란 자율정화를 위한 율장이 버젓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면 정교분리의 원칙이 존립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게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독자적 자율정화를 천명한 거죠.”

-어쨌든 법난은 잘못된 것이지만, 불교종단이 현세에 직면하고 있는 정의구현 사회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등한시 하고 있는 자세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없는 듯 너무나 무력해 보입니다. 종교인의 정치참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출가자나 성직자가 정치에 관여한다는 것은 정교분리원칙에서 볼 때 마땅치 않습니다. 정치인이 편향된 자세로 자기 종교만을 내세워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종교인이 나서서 정치에 직접 관여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종교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종교인은 국가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국민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종교단체로서 정치적 사회문제에 관여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의 권리나 복지 입장을 천명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하면서 언제까지 상구보리에만 붙들려 있어야만 합니까!! 상구보리 하겠다는 것이나, 하화중생이란 것 자체가 구호 일뿐 좀처럼 들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결국 허위가 아니겠습니까? 상구보리 이룬 후에 하화중생 할 수 있다는 말은 잘못된 상구보리의 지향점일 뿐, 목적 없이 상구보리만을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상구보리가 중생의 생사해탈에 있다고 해도, 그 현장은 중생의 생사이건만 중생의 현장을 살피지 못하고 외면하면서, 별도의 상구보리를 찾는다면 그 또한 허상을 찾는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사회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까지의 상구보리 탐구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논리가 될 것입니다.-

“동사섭, 사섭법으로 중생과 함께하는 불교실천운동이 적극화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깨달음의 사회화 실천운동을 겸해야만 불교의 사회적 기능을 다한다 하겠습니다. 종단을 지켜보면서 행보를 맞춰가며 전진을 거듭해 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종단개혁 정화운동에 대해 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맴도는 처지가 된 셈이기도 하고요.”

-스님, 아무래도 스님께선 미국보다는 본국에서 중심활동을 해나가야 종도들을 이끌 수 있으리라 보는데, 미국에는 오래 계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요, 미국은 잠시 머물 뿐, 한국에서 주요 활동을 해볼 각오로 나름대로 구상하고 점검하고 타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국제교류를 위한 왕래도 해야만 견문을 넓히지 않겠습니까.”

* 스님은 수행자 모습을 두문불출하는 자세가 아니라 세속인들과도 늘 탐문하고 이들의 견해에서조차 수행자가 답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나서는 현실성이 내포된 수행자 상을 들어내 보이는 특유의 스님이신 듯 보였다. 참으로 그때 월주스님과의 대화는 잊혀 지지 않는 기억 속에 남아 오늘에 이른다.

<2016.2.24.>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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