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지혜롭게 처리하라

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 이를 최우선 간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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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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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을 지혜롭게 처리하라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8-30, (수) 5:11 am

<1>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지 마라.
성(性)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性)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事物)의 실체(實體)이다. 성(性)은 모든 존재(存在)가 본래(本來)부터 지니고 있는 불변(不變)의 본질(本質)이다.
불교는 이것을 법성(法性)이라고 표현한다. 법성은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상(相)을 갖지 않는다.
불교는 전체 속에 부분이 있고, 부분 속에 전체 있으며[一中一切多中一], 전체가 곧 부분이요 부분이 곧 전체이니[一卽一切多卽一], 작은 한 티끌 속에 세계가 함장(含藏)되어 있고[一微塵中含十方], 낱낱의 티끌마다 세계가 다 들었다[一切塵中亦如是]고 본다. 이것이 바로 원융무애(圓融無礙)한 법성(法性)을 보는 불교의 관점(觀點)이다. 다시 말하면, 법성(法性)은 우주의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성과 자연의 만물에 내재하는 만물조화의 창조적 율동이 원융회통(圓融會通)하도록 길을 여는 본질로 보는 것이다.
불교권(佛敎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宇宙)의 본질(本質)을 보려고 평생을 걸고 애(阨)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화두(話頭)를 들고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매달리는 선객(禪客)들이 바로 그들이다.
선객(禪客)들이여, 견성(見性)하려고 성(性)에 매달리지 마시라.
처음 내킨 그 마음이 부처를 이룬 때고(初發心時便正覺), 생사와 열반의 본바탕이 한 경계이며(生死涅槃相共和), 이사(理事) 분별 혼연히 없는 그 곳이(理事冥然無分別), 시방제불 나타나신 불가사의(不可思議) 경계(十佛普賢大人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본질을 보려고 애를 쓰지 마라.

<2> 눈에 보이는 것이나 지혜롭게 처리하라
눈에 보이는 것은 일정한 주제로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거나 설법을 할 수 있는 승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 일정한 주제로 청중 앞에 서서, 강연하는 법회를 하지 않고 목탁을 두들기며 염불(念佛)만 계속하는 법회를 이끌고 나가는지 알 수 없다. 시중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돌고 있는데, 왜 절집에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목탁만 두들기는지---.
예를 들어서, 불교의 현대화(現代化) 대중화(大衆化) 생활화(生活化)라는 일정한 주제만 가지고도 몇 날 며칠 이야기를 해도 못다 할 일인데, 왜 이야기 하는 법회를 하지 않고 염불만 계속하는지 알 수 없다.
불교교단의 당면과제는 법당에 앉아 있는 대중 앞에 서서, 불교의 세계관(世界觀)이나 가치관(價値觀)을 정연한 논리로 강연을 지속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승려가 몇 사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연이나 논강을 할 수 있는 실력이 미비하기 때문에 목탁을 두드리면서 천수경이나 반야심경만 암송하고 예불이나 올리고 나서 사홍서원을 끝으로 법회의 막을 내리고 만다.
왜 말하는 법회를 열지 않고, 염불로만 법회를 마감하고 마는지 알 수가 없다.
강연이나 논강을 하지 않고 염불만 하는 법회를 계속하는 까닭은 세계를 리드하는 다양한 세계관과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다양한 학문체제와 지성 있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일정한 주제로 청중 앞에서 강연을 하거나 설법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당장,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문제는 승려의 자질부족이다. 어떻게 하면 눈앞에 당면한 이 문제를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견성(見性)보다 눈에 보이는 승려(僧侶)의 자질향상(資質向上)을 어떤 방법을 써서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는지 그 방안의 모색에 진력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글: 김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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