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가 불분명한 길에 서서 고민하는 수행자들

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 이를 최우선 간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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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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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형태가 불분명한 길에 서서 고민하는 수행자들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8-28, (월) 1:53 pm

오늘을 사는 불교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시대적 정황(情況)과 사회적 변전(變轉)에 맞춰서 그대그때 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1>
수행자(修行者)들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길을 걷고 있다. 견성성불의 끝이 어디쯤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 길에 발을 들여 놓은 수행자(修行者)들은 형태(形態)가 불확실(不確實)한 깨달음으로 가는 통로(通路)에 서서 고민하고 있다.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길이라고해서 오던 길을 버리고 다시 돌아설 수도 없다.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견성성불을 향해서 가던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밖에 없다.
수행자들이 걸어가는 길의 방향(方向)과 목표(目標)는 상정(想定)되어 있지만,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반듯하게 나타나 있는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는 견성성불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길을 곧장 가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은 주어져있지만, 견성(見性)을 성취한 선배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견성(見性)으로 가는 길이 어디쯤에 존재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성불(成佛)하려는 의지(意志)에 함몰(陷沒)되어 화두(話頭)를 들고 선원(禪院)을 한 십여 년 돌아다닌 경험을 가진 수행자는 성재작용(性在作用)이라는 언구(言句)를 만지막이며 성(性)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작용(作用)하는 가를 알아보고자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든다. 그러나 아무리 성(性)의 작용처(作用處)를 살펴보아도 성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조사(祖師)들의 전등록(傳燈錄)을 들추게 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단초(端初)라도 손에 쥘까 하고 전등록을 읽는다. 초기선종(初期禪宗)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菩提達摩)로부터 혜가(慧可) 승찬(僧璨) 도신(道信) 홍인(弘忍) 혜능(惠能)을 비롯하여 신회(神會), 회양(懷讓), 도일(道一), 회해(懷海), 희천(希遷), 보원(普願), 조주(趙州), 의현(義玄)등 이름 있는 선사(禪師)들의 전기(傳記)를 두루두루 읽어보아도 성재작용(性在作用)의 비전(祕傳)을 파악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길 없어 들고 있던 전등록(傳燈錄)을 덮어버린다. 그런 다음에 선택한 길이 만행(萬行)이다.
참된 만행은 입전수수(入廛垂手)가 가능한 지혜자(智慧者)만이 실행 가능한 만행인데, 초견성(初見性)도 성취하지 못한 수행자가 만행을 나서는 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하는 수 없이 뛰어넘는 담벼락이다.
목탁을 들고 만행(萬行)에 나선 수행자(修行者)는 사람들이 들끓는 시전(市廛)으로 길을 잡는다.

<2>
시전(市廛)으로 들어선 수행자의 앞에는 21세기 지능(知能)의 시대(時代)가 펼쳐져 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보류(保留)한 채 목탁(木鐸)을 손에 들고 만행에 나선 수행자는 21세기 나노과학시대의 이방인(異邦人)이다.
21세기 나노과학시대는 사물(事物)이나 현상(現象)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지적인 능력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 시대이다. 나노과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21세기는 “지능(知能)의 시대”라고 언급한다.
한 개인이 갖춘 지능이 자신의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해결하는 인지적 기능이 미비할 경우, 사회생활을 통해서 그가 맞이하게 될 불이익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이 심각한 수준에 처하리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가장 먼저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될 작업은 수준 높은 지능(知能)의 배양(培養)이다.
어떤 개인의 지능이 미약하여 문제해결 및 인지적 반응을 나타내는 능력의 수준이 일반적인 평상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이상 불행한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21세기 물리학자들의 지능은 4세대 방사광가속기(放射光加速機)를 원용하여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을 직접 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지능이 출중한 과학자들은 화학적 성립과 구조가 간단한 원소(元素)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포항공대(浦項工大)에 설치된 4세대 방사광가속기(放射光加速機)는 태양보다 100경(京) 배나 더 밝은 광명(光明)으로 1000조 분의 1초로 움직이는 원소(元素)의 현상(現象)을 관찰할 수 있다. 방사광가속기를 통해서 물을 이루는 수소(水素)와 산소(酸素)가 어떻게 붙고 떨어지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며, 소금을 구성하는 원소인 나트륨(na)과 염소(鹽素)가 어떻게 붙고 떨어지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의 궁극적 실체인 전자와 양성자와 중성자를 사람의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소와 산소가 붙어서 물을 이루고, 나트륨과 염소가 붙어서 소금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중연화합생기(衆緣和合生起)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과 저것이 인연에 따라 서로 만나서 새로운 생기(生起)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원리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전자를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궁극적 실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동안 사물(事物)을 앞에 놓고, 이것이 무엇인가, 존재의 궁극적 실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불확실한 어림셈으로 진리를 말해 왔다. 그러다 오늘은 방사광가속기(放射光加速機)를 통해서 존재의 실체를 확연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5만 년 전, 지구촌에 인류가 태어난 후, 오늘에 이르도록 모든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물질의 기본 요소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천리(天理)를 함께 나누는 신우(神友)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지능의 시대에, 고요한 산방(山房)에서,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화두(話頭)를 들고 존재의 실체를 궁구하는 수행자들의 손에는 과연 무엇이 들려 있을까.
화두를 들고 존재의 궁극을 탐험하는 수행자들이 아니더라도, 21세기 나노과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존재의 궁극적 근원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신령(神靈)한 천리(天理)를 함께 나누는 신령우(神靈友)로 거듭 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3>
불교의 수행자들은 지능(知能)의 시대(時代)에서, 신령(神靈)한 천리(天理)를 나누는 신령우(神靈友)들 속에 섞여서 묵연정좌(黙然靜坐)를 반복하며 지능의 배양과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21세기 지능의 시대는 존재(存在)의 궁극적(窮極的) 실체(實體)가 무엇인가를 이미 읽고 있는데, 수행자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묵연정좌를 계속하고 있다.
형태가 불분명한 길에 서서 고민하는 수행자들은 더 이상 존재의 실체를 알고자 화두(話頭)를 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목탁(木鐸)을 들고 만행(萬行)에 나설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존재(存在)의 궁극적(窮極的) 실체(實體)는 전자(電子)와 양성자(陽性子)와 중성자(中性子)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1600년 전에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土着化)를 구현했다는 성과(成果)를 내세우며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화두(話頭)를 앞세운 채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지(奧地)의 숲속에 앉아 21세기 지능의 시대와 무관하다는 듯 침묵(沈黙)을 지키며 “이렇게 사는 것이 정법(正法)이다”라고 부르짖고 있어서는 안 된다.

불교의 근본(根本)은 모든 사람이 보살(菩薩)이 되어, 높은 지능을 갖추고 세상에 널리 참여하며,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지혜를 나누면서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불교지도자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신도들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佛法)을 믿고 따르는 불교도들은 오늘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무엇을 원리(原理)로 세우고, 어떠한 학문체제(學問體制)를 세워서 지능(知能)이 출중한 인재(人才)를 어떻게 양성해내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며, 사람들과 함께 섞이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①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리(原理)는 기계론(機械論)이며, ②사회를 움직이는 메카니즘은 물리적 체제와 정신적 체제와 사회적 체제라는 것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기보다 그 모든 것들, 즉 세계를 리드해 나가는 원리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학문체제를 무시하고 앉아 있는 것이다.

당면한 현실을 무시하는 불교지도자(佛敎指導者)들의 몸가짐은 잘못 알려진 불교의 이상주의(理想主義)와 초월주의(超越主義)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복잡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죽림(竹林)에 칩거하며 견성(見性)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해서 현실 세계를 리드해 나가는 기계론과 메카니즘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견성(見性)으로 인하여 세계를 이끌고 가는 기계주의(機械主義)와 학문체제가 무시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를 리드해 나가는 원리(原理)와 사회를 움직이는 메카니즘은 17세기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시행(試行)되고 연마(硏磨)되고 첨삭(添削)되고 갈고 닦는 과정을 경유(經由)해서 오늘을 이끄는 원리와 학문체제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기계론과 메카니즘은 지구촌(地球村)의 현대문명(現代文明)을 견인(牽引)한 우수한 이론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나노과학시대를 이끌고 나가는 시대적 기린아(麒麟兒)이기 때문이다.
나노과학시대를 살아가는 불교도들은 이와 같은 세계의 실상(實像)과 사회적 정황(情況)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늘을 사는 불교도들은 불법(佛法)의 진수(眞髓)를 철저하게 공부하는 한편, 세상 사람들에게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①세상을 리드하는 이론체계와 ②사회를 움직이는 메카니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끄는 원리와 사회를 이끄는 메카니즘을 모르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불교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설명능력(說明能力)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마치 한강에서 살아야 하는 물고기가 한강의 수질에 맞도록 자기유지능력(自己維持能力)을 함양하고자 한강수(漢江水)의 수질(水質)에 관한 구체적인 앎을 획득하려는 태도와 흡사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 세상을 잘 살아내려거든, 세상에 대한 확실한 앎을 손에 쥐고 자기 앞의 삶을 모색해야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주의(現實主義)와 이상주의(理想主義), 형이상학(形而上學)과 형이하학(形而下學)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내용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세상에 유행하는 모든 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올바른 불법(佛法)을 깨달아 올바른 삶을 영위해 나가기가 어렵다.
삶에 관한 정확한 앎이 없이는 구체적인 삶의 진행이 어렵다. 세상의 이치(理致)와 격물(格物)을 모른 채 세상을 잘 살아내려고 덤벼드는 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대부분의 불교도들은 착실하게 불법(佛法)만 믿고 따르면 그만이라는 아주 소박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교도들처럼 소박한 마음으로 일관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사는 세상이 아니다. 다양한 세계관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사회를 움직이는 메카니즘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비웃고 무시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는 불교의 교리를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이론과 사회를 움직이는 메카니즘에 관심을 갖고, 세계는 물론 사회의 구조와 근간을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과 지근거리에 있는 친인척에게 “삶의 세계의 구조와 운행원리”를 자세하게 들려 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불교를 믿는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실제적인 생활에 긴요(緊要)한 메시지를 들려 줄 수 없게 된다는 뜻이다.
오늘을 사는 불교도들은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시대적 정황(情況)과 사회적 변전(變轉)에 맞춰서 그대그때 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향해서 시의(時宜)에 적절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성찰과 미래의 비전이 동행하는 새로운 출발을 결행할 때가 바로 오늘이라는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한다. ♣

글: 김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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