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달마(菩提達磨)의 혈맥 2조에서 6조까지

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 이를 최우선 간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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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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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보리달마(菩提達磨)의 혈맥 2조에서 6조까지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8-07, (월) 10:07 am

초기선종의 2조 혜가(慧可)

혜가는 달마의 법을 이은 대선지식이다. 승가(僧可)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어졌던 혜가는 시경(詩經)과 역경(易經)에 깊은 조예를 가진 인물이었다. 혜가는 달마대사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의 관점을 진제제일의(眞締第一義)로 고정시킬 수 있었으며, 헤맴(방황)을 극복하고 오직 진제(眞締)를 깨닫기 위해 일생을 도에 기울였다.
혜가대사가 달마대사를 만나게 된 연유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그가 14세 때 숭산 낙양 지방을 유행하던 달마대사와 해후를 했다는 일설이 있으며, 다른 설은 그의 나이 40세 때 달마대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매우 수상한 사람으로 고발되어 처형을 당했을 당시의 나이가 107세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40세 때 달마대사를 만났다는 설이 신빙성이 있다.
제2조 혜가는 속성이 희(姬)씨이며 무뢰(武牢)사람이다. <속고승전>은 호뢰(虎牢)로 적었지만 무뢰(하남성 형양군 사수현 서부)가 옳다. <남종정시비론>에 따르면 신광(神光)으로도 알려져 있다.
혜가는 40세 때 달마대사를 만나 6년 동안 사사를 받고 진제(眞諦)에 눈을 떴다. 그가 달마대사를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문 밖에 오래도록 서 있자 허리까지 눈이 쌓였다. 그러나 혜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릇 법을 탐구하려면 몸을 아껴서는 안 된다."
혜가가 법을 얻을 결심에서 한 쪽 팔뚝을 자르자, 흰 젖이 흘러나왔다. 달마대사는 혜가의 법을 얻으려는 결심이 대단함을 알고 무언의 맹세를 허락했다. 달마는 혜가에게 남몰래 한 벌의 가사를 건네주었다. 달마의 곁에는 이미 도육이나 총지와 같은 제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달마는 한 벌의 가사를 혜가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것 때문에 독약을 먹었다. 그대도 이와 같은 일을 피하지 못하리라. 실수 없도록 조심하기 바란다."
혜가는 가사를 받고 난 다음 달마에게 물었다.
"스승의 이 법은 이제까지 누구에게서 전승해 나왔으며 누가 스승께 법을 상속해주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자세한 것은 선경(禪經)에 씌어 있다."
"서국에서 누구를 후계자로 삼으셨습니까."
"서국 사람은 성실하고 거짓이 없다. 후계자는 반야바라밀다라(般若波羅蜜多羅)지만 가사를 전승해주지 않았다. 당나라 사람은 대승 소질이 있지만, 도를 잡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거짓으로 말하기 때문에 가사를 전승함으로써 도의 증거를 삼는다."
혜가는 달마로부터 도를 이어받은 후 40년 동안 완산 낙주 상주에 몸을 감춘 뒤, 인연이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다. 출가자는 물론이요 재가자도 수없이 많았다.
우리들은 왜 부처가 돼있지 않은가
능가경(楞伽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성자(부처님)는 고요한 마음으로 내성함으로써 만들어져 있는 두두물물로부터 멀리 벗어난다. 그것을 집착되지 않는 도라고 부르며 현세도 내세도 항상 청정하다. 사방팔방의 많은 부처님 가운데서 어느 한 분이라도 좌선법에 의하지 않고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은 있을 수 없다.”
깨달음에 이르는 열 단계를 언급한 10지경(十地經)에서도 말한다.
"사람의 몸 속에 다이아몬드 같은 부처님의 법체가 간직돼 있다. 부처님의 법체는 태양처럼 그 자체가 밝고 완전하여 한량없이 크고 넓다. 그렇지만 이 부처님의 법체(본질적 요소)를 우리들의 정신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오온)가 그것을 덮어 감추고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겹쳐진 구름처럼 실체를 갖지 못한 다섯 가지 요소는 지혜의 폭풍이 불어닥치면 구름같이 흩날려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의 본성(과정적 실체)은 완전하게 빛날 것이며 불꽃처럼 깨끗해진다."
화엄경에서도 불성(우주의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한없이 광대무변한 세계와도 같고 끝없는 허공과도 같다."
일체 중생의 청정한 본질(우주의 미분화된 심미적 연속성과 자연에 내재하는 만물 조화의 창조적 율동의 작용에 의한 순수기연의 창발성)은 불래불거(不來不去)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이다. 사물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멋대로 대상화하는 상념과 억측과 욕망이라는 겹쳐져 있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는 것만으로 신성한 절대 진리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만일 제멋대로의 상념이 일어나지 않는 묵연정좌(默然淨坐)의 침묵으로 깨끗하게 앉아 있게 된다면 위대한 절대 진리는 있는 그대로 밝은 빛을 떨치게 될 것이다.
얼음은 물에서 생기지만 일단 만들어진 얼음은 물의 흐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얼음이 녹으면 물은 저절로 예전처럼 흐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방황(헤맴)은 진실에서 일어나지만 방황은 진실을 헷갈리게 하며 헤맴(미망)이 사라지면 진실은 자연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마음의 바다는 본래부터 맑고 아름답다. 정신을 어둡게 하는 다섯 가지 요소만 걷어낸다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빛을 나타낸다.
수행자가 고전(古典)의 말(문자를 가리킴)에 의하여 진여실상(있는 그대로 참된 것)을 배우는 것은 마치 바람에 깜박이는 등불에 의지하여 넓은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이와는 반대로 가만히 앉아 묵연정좌를 이룬 후 아무런 일이 없다면 고요한 방안의 등불처럼 어둠을 깨고 환하게 실체를 바로 비춰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 마음이 근원적으로 맑다는 것을 깨달으면 모든 희망은 이루어질 것이요, 모든 수행은 충족되고, 모든 일이 아름답게 열매 맺어서 다시는 헤맴(혼란과 방황)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스스로 자기 마음을 반성하여 스스로 자기를 구제할 따름이며, 부처님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부처님이 만일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과거에 이미 수없는 부처님을 만났는데 어찌하여 구제받지 못했을까. 수없는 부처님들로부터 구제를 받아 부처가 되었을 일인데 어찌하여 우리들은 부처가 돼있지 않은가. 그 까닭은, 성실한 정신이 그 사람 속에서 눈뜨지 않고 입끝으로만 부처님을 찾았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터득하고자 하지 않고 전세의 숙명대로 헤매는 육신을 이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겠는가."
혜가는 그 자리에서 왼팔을 자르고도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랜 충복처럼 시침을 떼고 있었다. 달마는 그가 진리를 배움에 최선을 다한다고 믿고 방편에 의한 지도를 함으로써 혜가의 마음을 진리의 세계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하기를 5년, 그는 깊이 진리를 구명하여 명확한 오의에 통달했다.
달마대사가 서역으로 돌아가고 말자 혜가는 소림사에 머물렀다.
혜가는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간에 언제든 마음이 진실을 지향하여 일치함과 아울러 상대의 동향에 따라 가르쳐 지도했다. 그의 지도방법은 달마의 그것과 일치했다.
울림의 소리에 응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에 관하여 깨달음을 알려주고, 행동을 통해 이해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그러므로 제자들 중에는 남몰래 기록을 남기는 이도 있었다.
혜가는 후의(后衛)의 천평(天平) 연간(534-537)에, 업(?) 위(衛)지방을 유행했다.
그는 지방의 곳곳을 유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교화했다. 승려 가운데에서 혜가를 시기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혜가에게 독물을 먹였지만 혜가는 그것을 알면서도 독물을 먹었다. 그러나 독극물이 그를 해치지는 못했다.
혜가의 제자는 날로 증가했다. 그의 독특한 지도를 받아 깨달음을 연 사람이 날로 증가했다.
혜가는 40년 동안 완산 낙주(洛州) 상주(相州)에 몸을 감춘채 보림을 계속한 후 비로소 교화에 나섰다. 출가 재가의 귀의자가 헤아릴 수 없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그럴즈음 주(周)나라의 불교 억압 사건이 일고 또 보리유지 삼장과 광통율사의 제자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직면했다.
혜가대사는 승찬(僧璨)에게 법통을 전승하고 사공산(司空山)으로 몸을 감추었다. 위기를 넘기고난 혜가는 이름을 감추고 거리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거리 설법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거리 설법을 경청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보리유지 제자들이 혜가대사를 가리켜 '수상한 사람'으로 몰아 관가에 고발했다. 고발에 따라 나라에서 명을 내렸다. 혜가대사를 조사한 관리는 보리유지 제자들의 주장대로 그가 확실히 수상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심문을 맡은 관리는 고발자들의 질투인 줄 알면서 대사를 심문하는데 대사는 자기자신을 가리켜 '나는 틀림없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현감 택중간에게 칙령을 내려 법대로 처형하도록 했다.
혜가는 이때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법문은 4대 조사 때에 이르러 명복만으로 타락될 것이다."
혜가는 마침내 형을 받고 마지막을 장식했다. 그의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그의 몸에서는 흰 젖이 흘러나왔다.
택중간은 혜가의 최후의 모습을 그대로 복명했다. 황제는 택중간의 복명을 받고 크게 후회했다.
"그야말로 참다운 보살이었구나. 우리의 실수로 참된 사람을 억울하게 했구나."
조정의 신하들은 혜가의 의연한 죽음으로해서 발심을 했고 불교에 귀의했다. 주나라의 불교 억압정책은 철회되었으며 불법은 다시 흥왕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혜가대사의 나이는 1백7세였다. 그의 무덤은 상주 상안현 자맥하(子陌河) 북족 5리의 동류구(東柳溝)로 경정되었으며 무덤에서 약간 떨어진 장소에 오아조구(吳兒曹口)가 있다.
양능가업도고사(楊楞伽?都姑事)라는 사기에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 뒷날 석법림(釋法琳)이 그의 비문을 지었다.
혜가는 일찌기 자기의 의발을 전한 승찬(僧璨)에게 부촉했다.
"내가 선대 스승으로부터 부촉받은 진리 그대로를 그대에게 전하고자 한다. 그대는 반드시 진리를 널리 전도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제도하라."
혜가는 또 능가경(楞伽經)을 중심으로해서 진리를 구명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능가경 연구는 앞으로 4대를 지날 즈음이면 형식적 분석으로 타락되고 말 것이다. 참으로 슬픈일이고야."
달마대사를 초조로 하여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으로 이어지는 능가주의 운동가들은 분명히 '능가경(楞伽經)'을 소의경전으로해서 절대 진리를 구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렇지만 혜가대사가 미리 예측했던 대로 능가경은 4대(승찬 도신 홍인 혜능)가 지나고난 후에는 형식적인 분석으로 타락되고 말았다.
혜능의 뒤를 이은 회양과 행사는 물론이며 마조 백장 황벽 임제, 석두 약산 운암 동산등 모든 조사들이 능가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혜가대사의 부촉을 어기고, 다시 말하면 능가주의와 반야주의를 어기고 색다른 조사선을 개발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초기선종(初期禪宗)과는 전혀 다른 선종(禪宗)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마대사는 원리적 방법과 실천적 방법을 통해서 절대 진리를 답득하고자 했으며 상키아체계를 통해서는 원리적 방법을, 파탄잘리체계를 통해서는 실천적 방법을 완성하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상키아체계와 파탄잘리체계를 병행하고 통합하여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혜능의 뒤를 이은 조사들은 하나같이 실천적 방법인 파탄잘리체계를 원용하지 않았다. 논리적 질서를 버리고 심신일체의 초현실적 실질 체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능가주의와 반야주의의 실천적 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되는 파탄잘리체계를 도외시했다는 것은 초기선종이 추구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선(禪)을 지향했다고 볼수 있다.
달마대사는 모든 존재를 진여의 실상으로 보고 자기의 눈앞에 현존하는 일체를 아무 두려움 없이 맞이하기를 바랬다. 일체 존재가 있는 그대로 진여 실상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기를 권고했다. 혜가가 달마에게 했던 말도 역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는 표명이었다. 달마는 혜가의 말을 듣고 불편한 마음을 나에게 보이라고 말했지만 혜가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자기가 맞이한 상황이나 자기가 대면하는 대상으로부터 공포심을 갖거나 편안하지 못한 마음이 되는 까닭은 스스로의 마음의 작용에 억압을 가하고 장애를 끼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마음에 장애를 가하지 않으면 편안한 마음이 안될 까닭이 없다고 달마는 말했다.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남긴 말은 대단히 긴요한 내용이다. 요제를 지적한 그의 말은 훌륭한 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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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 二祖慧可

慧可,一名僧可,俗姓姬氏,虎牢(今河南??)人。他是天竺??菩提?摩的入室弟子,在中??宗史上,被尊??宗?土二祖。

慧可生于北魏孝文帝太和十一年(487年)。年???儒,???史,后??依佛?,精?三藏典籍。曾入京城?人交流??。??佛?界思想比?守?,??之?、派系之?相??重。所以慧可?然有?多?到的?解,?因无所?承,而受到?踞高位的僧中令望的非?和冷遇。他?才不遇,只得退??里,默默地??地?自探索着佛?的精?。

?莫在他40??,菩提?摩大??到魏境,在嵩山至洛?一?游化?道。慧可??一僧人道育,??摩接?后知道?是一位了不起的大?,便?心地奉?摩??,追?在?摩左右,周到地?他??衣食,竭?加以照?服侍。如此??四五年之久,?摩?他??人的??所感?,便把自己??的精髓?授?他?。其要点是“壁?”和“四行”。“壁?”又?“理入”,??一切含生都具有同一?性,只是受到?妄的“客?”障蔽,才陷入迷?,不自知自身具有?性。因此要通?凝住安心,使外止??,?心无喘,心如?壁,悟入?相,?而?到无自无他,凡?等一,?道冥符,寂然无?的境界。??方法偏重于理?思考,也叫做“藉?悟宗”。“四行”就是“行入”,?于日常行事的??,具??容有“?怨行”、“??行”、“无所求行”、“?法行”四?,主旨在逆??受,无欲无?,求得心境的平安适道。

慧可向?摩??了6年,透?地理解了大乘空宗的要?,?到了理事兼融,苦?无?的境界。也?是他在??中比道育更??更敏悟,所以最后?摩?定?慧可作?自己法系的?承人,?授?他4卷《楞伽?》,?咐?:“我看中?境?,只有《楞伽?》最适宜?播。?依照此?修行??,自然可以?度?生。”慧可牢?老?的?托,??地?行“壁?”和“四行”,同???地按照《楞伽?》的宗旨行事。

?摩逝世后,慧可埋名?迹,在?河沿岸一?行道。然而由于他早年?立的好名?,?是有?多的道俗信徒想方?法探?到他的行踪,前?致敬,要求拜他??。慧可不忍拂大家的好意,便??他的好口才,剖析入微地?述了?摩?的要旨。于是??一?的?摩??,便迅速而?泛地?世人所知。

天平初年(534年),慧可?到?魏新都?城(今河南安?市北),大力?播?摩?新??。在?里,他受到了??派的多方阻?和打?。有一位?有徒?千人的道恒??,正在大力?授???。?慧可到?,?新立?,吸引了不少信?,便攻?慧可的言?是魔?,派遣上足弟子去和慧可??。?想到其弟子到了慧可?座,?了慧可?法,泰然心服,反而不?道恒??,干脆就留下?向慧可??,不回道恒??命。道恒?差遣的人去而不返,又?遣第二人,如此再三,都有去无回。?了一些天,道恒在路上遇??些派出的弟子,便???:“我用了?多功夫??培???,?如打?了??的眼目,??竟敢做出??背?的事??”弟子?答道:“我?的眼目本?是正的,因??了?的??才?斜了。”道恒?怒已?,更加痛恨慧可,不惜?通地方官加害慧可。慧可受到迫害,?些送了生命,不得已???都,流?于?、?之?(今河南安?至汲?一?),?光晦迹,不敢再公?地大?模地??。正是由于???故,慧可?年弟子不多,?且始??有?定自己?可的法嗣。

但是,任何一??正有生命力的新??、新思想,?不是貌似强大的??力所能?抑、??得了的。慧可?然身?逆境,可是向他求??益的人仍然不?如?。江南著名的三?宗?者慧布到北方游??,?曾慕名向慧可叩??法,得到印?。?有一位向居士,是北?天保初年(550年)著名的???者,也曾修??慧可通好,???有??如?宇宙万有之?系的??。慧可以??的形式作了回答,文曰:?此?法皆如?,??幽理竟不殊。本迷摩尼?瓦?,豁然自?是?珠。无明智慧等无?,?知万法?皆如。愍此二?之徒?,伸?措?作斯?。?身?佛不差?,何?更?彼无?。?中无?就是涅槃的意思。全?大意是万法皆同?如,?生之身?佛无?。如果??有差?,那是一?迷?的????。只要空一切相,?一切差?,?一切迷?,就能?到本性??的涅槃境界。所以涅槃成佛,都要向自己?心去?求,无?在身外?求涅槃境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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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선종의 3조 승찬대사

수나라 때의 승찬대사는 언제 어디에서 출생하여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자세한 기록이 없다. 그가 스승인 혜가대사를 만나 법을 잇게 되었다는 기록만이 역대법보기에 남아 있다.
초기선종의 제2조인 혜가가 성안현 현감인택중간에 의해 사형집행을 받고 죽기 이전에 승찬이 혜가로부터 법을 이었다는 아주 간단한 기록만이 역대법보기에 남아 있다.
달마대사가 536년 경에 세상을 떴으니 6세기 말기의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승찬선사가 스승인 혜가선사를 만났을 때 건강이 좋지 못했다. 중풍에 걸린 부실한 몸으로 대중 가운데 섞여 고요한 묵상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본 혜가는 대뜸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혜가선사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그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아 혜가는 다시 물었다.
"나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가."
승찬은 그제서야 혜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스님께 사사하고 싶습니다."
혜가가 다시 물었다.
"그대같은 중풍 환자가 나를 만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승찬이 말했다.
"몸은 비록 허물어 졌을지라도 이 마음만은 스님의 마음과 다름이 없습니다."
혜가선사는 승찬선사의 사람됨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를 가르쳐 달마의 밀지를 전하기로 작정했다.
혜가는 선대인 달마대사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독약에 의해 생명을 잃게된 일을 한시도 망각할 수 없었다. 동시에 새로움이 아무리 존귀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새로움을 용납받게 되기까지 대단히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혜가는 선대의 죽음을 보고 자기자신의 운명도 결코 평탄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상에 늘 위험이 따른 것처럼 승찬에게 달마의 법을 전승한다면 승찬도 역시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예측했다. 승찬에게 법을 전수한 혜가는 자신의 예감에 맞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새로운 불교의 선법(禪法)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선대 선사들은 목숨을 잃는 순간에도 - 초조인 달마선사와 2조인 혜가선사가 모두 법을 위하여 생명을 잃게 되었다 -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라는 말을 외쳤다.
혜가선사는 승찬선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앞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몸을 조심하게. 나의 신상에 항상 위험이 따르고 있다면 앞으로 자네의 신변에도 위험이 따를 것일세.
그대는 되도록 나의 일에 말려들지 말고 멀리로 피신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일세."
혜가선사의 부축을 받은 승찬선사는 거리에 나가 미치광이 짓을 여러 날 계속하다가 어느날 불현듯 자취를 감추었다. 서주에 있는 사공산(思空山)에 몸을 묻었다. 사공산에서도 오래 있을 수 없어서 다시 완공산으로 피신했다. 주(周)무제(武帝)의 폐불 횡포를 피해 완공산에 몸을 묻고 10년 동안 칩거했다.
완공산은 워낙 산세가 험준하여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인적이 끊긴 악산인지라 맹수들이 들끓었다.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맹수들에게 살상을 당하는 일이 잦았다. 승찬선사가 완공산에 온 이후로는 맹수들도 찬선사를 알아보고 다른 산으로 떠나갔다.
찬선사는 선대인 혜가선사로부터 법을 물려 받은 후 완공산에서 선수(禪修)에 전력하여 자증성지(自證聖智)를 더욱 공고히 했다. 찬선사가 혜가선사로부터 선가의 비법을 전수받고 완공산에 묻혀 그의 자증성지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달마의 정법은 이입(理入)과 사행(四行)을 견고하게 지켜나가는 것을 말한다. 사행 중에서도 법대로 사는 삶을 가장 수승하게 여긴다.
법대로 살기 위하여 정법을 사수하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왜 법대로 살려는 사람을 해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정법이 무섭기 때문이다. 법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은 법대로 사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법대로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해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세에서는 법대로 살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깊은 산 속에 몸을 묻는 것이다. 아무리 깊은 산속에 깊이 몸을 묻어도 정법을 지키는 사람은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들어나기 마련이다.
송곳같은 기개와 신념을 가진 몇몇 안되는 정법학자(正法學者)에 의해서 정법의 맥락은 끊이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간다. 그래서 선가의 혜맥(慧脈)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정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등(傳燈)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어두운 암흑세계를 밝힐 수 있는 빛의 씨앗을 꺼뜨리지 않고 면면히 이어 나왔다는 뜻이다.
하나의 이념, 하나의 신념, 하나의 정신이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고 1400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 내려 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떻든 승찬선사의 높은 도성(道聲)은 제방에 널리 알려졌다. 여러 사람들이 찬선사를 설명했다. "달마조사가 법통을 전승해준 이래로 승찬선사처럼 신비롭고 찬란하게 빛을 일으키는 보주(寶珠)는 없다. 선정과 지혜가 평등하게 작용하는지라 그가 갖는 깊은 생각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이 높다."
승찬선사는 법난이 잠잠해진 다음 여러 선사들과 함께 나부산(광동성 전백현과 박라현 경계에 있는 산인데 예로부터 도교의 영지로 이름이 높다)으로 돌아가 몸을 감추고 3년 동안 다시 칩거했다.
문제(文帝)가 수(隋)를 세우고(581년)난 20년후 인수(仁壽) 초년(601년) 대회제(大會齊)가 열렸다. 문제는 13개 주에 명하여 사리친견법회를 열었다.
승찬선사는 처음으로 산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의 눈빛은 형형했으며 기상도 역시 대단했다. 대중 앞에 우뚝 서서 처음으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여기 있는 것은 유일무이한 진실일 뿐 제2도 없고 제3도 없다. 따라서 깨달음의 경지는 거기에 숨겨져 있고, 언어 표현이 미치지 못한다. 진리의 주체는 망망하고 고요하여 듣고 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글자와 말은 소용없는 사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찬선사는 다시 말했다.
"나는 당장에 먹고 싶다."
제자들이 음식을 바쳤다. 음식을 먹고난 찬선사는 목청을 가라앉혀 말했다.
"세상사람들은 모두 좌선에 든채로 죽는 것을 우러러 보고 훌륭하다고 말한다. 그대들은 앉은 채 죽는 것을 기이하게 여길 것이나 나만은 생사를 자유자재로 한다. 나는 이제 선채로 죽으려 한다. 나는 생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찬선사는 말을 마친 후 한쪽 손으로 회의장 앞의 나무 가지를 잡고 조용히 선 채로 숨을 그쳤다.
그는 누에고치 속에 갇혀 있던 벌레가 자기를 속박하던 두터운 껍질을 벗고 선탈(蟬脫)을 단행하여 드높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르듯, 나무 가지 하나를 손으로 잡은채 조용히 자신의 빈 껍질을 떠나 멀리로 날아올랐다.
찬선사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찬선사의 탑묘는 완산사의 옆에 있다. 설도형이 비문을 지었다.
승찬선사는 여러 제자중에서 도신에게 법을 전했다. 승찬선사는 말도 하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지만 그의 법을 이은 도신선사는 그렇지 않았다.
북주(北周)가 망하고 수나라가 세워진 해가 581년이요,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선 해가 618년이다. 승찬선사는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한 시기에 태어난 인물로서 정법안장을 지키고자 극심한 고초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찬선사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정법을 굳굳하게 지켜나갔다. 초조인 달마대사와 2조인 혜가대사가 외부의 힘에 의해 목숨을 잃은 반면에 찬선사만은 자기의 임의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우뚝 선 채 스스로 선탈을 결행했다는 것은 후일 선종(禪宗)의 앞날을 예측 할 수 있게 한다. 도신과 홍인을 통해 달마의 선맥이 이어져 나가지만 혜능 이후로부터는 그 맥락이 사실상 단절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혜능을 끝으로 하여 달마의 의발이 전승되지 않는다는 것은 혜능의 다음 대에 이르러서는 초기선종의 종지가 굴절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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俗姓孫,河南開封人。幼年愛好佛學,曾多次遊方河北、江南、西北等處,當時人稱?「赤頭璨」,後來慧可傳授心法,成?禪宗三祖。僧璨經歷過「周武法難」曾經隱遁於安徽省舒州附近,唐玄宗賜諡?「鑑智禪師」。

北齊天平二年,有一居士,年踰四十,不言名氏,聿來設禮。而問師曰:「弟子身纏風恙,請和?懺罪。」
師曰:「將罪來,與汝懺。」 士良久曰:「覓罪不可得。」
師曰:「與汝懺罪竟。宜依佛法僧住。」 士曰:「今見和?,已知是僧。未審何名佛、法?」
師曰:「是心是佛,是心是法,法佛無二,僧寶亦然。」 士曰:「今日始知罪性不在內,不在外,不在中間,如其心然,佛法無二也。」
師深器之,??剃髮,云:「是吾寶也。宜名僧璨。」其年三月十八日,於光福寺受具,自?疾漸愈。 

有一天,一位年約四十歲的居士?來見慧可。居士低頭謙卑地說:「我可能是前世作?,今日才會惡疾纏身。我特地來向和?懺悔!」

慧可說:「把?的罪拿來,我來替?懺悔。」
居士說:「我?了半天就是?不到罪?」
慧可說:「我已經替?懺悔了,?知道僧佛法是什???」

居士說:「今天來見和?,知道什?是僧,可是還不知道什?是佛、法?」
慧可說:「心就是佛,心就是法,佛和法沒有什?不同。」
居士大悟說:「我現在才明白罪不在內,不在外,也不在中間,佛法也是如此。」

慧可極?讚賞,便收他?徒,?他取名?「僧璨」,後來他繼承正眼法,成?禪宗的三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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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선종의 4조 도신(道信)

쌍봉산(雙峯山)에서 도신(道信:580~651)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승선(大乘禪)이 일어났다.
5백여 명의 수행자들이 쌍봉산에 모여 새로운 형태의 선종교단(禪宗敎團)을 구축한 것이다.
초조(初祖) 달마(達摩), 2조(祖) 혜가(慧可), 3조(祖) 승찬(僧璨)이 모두 비명횡사했다. 격의불교(格義佛敎)로 출발한 중국불교지만 6세기 당시에는 상당한 세력으로 굳어 있었다. 이와 같은 불교 세력과 다른 대승선을 표방한 초기선종(初期禪宗)은 바람앞의 등불과 같았다.
승찬으로부터 선법을 이어받은 도신이 쌍봉산에서 선종교단을 일으켜 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선종의 주장일 뿐이다. 도신은 후일에 이르러 달마계(達摩系) 초기선종의 4조로 추앙되지만 도신전(道信傳)의 자료인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그와 같은 사실의 기록이 눈에 뜨이지 않는다.


도신의 성은 사마(司馬)이고 출신지는 미상이다. 7세가 되었을 즈음에 어떤 스승을 섬겼다고 한다. 비록 스승의 계행은 불순했지만 5년 동안 심신을 청결히 했다. 어느 날, 완공산에서 두 선사가 조용히 선법을 닦는다는 소문을 듣고 완공산으로 처소를 옮겨 선법을 배웠다. 도신이 완공산으로 자리를 옮겨 선법에 준한 수행을 깊게 했다는 기록은 승찬이 완공산에 몸을 순긴채 대승선에 주력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도신은 그들 대승선을 가르치는 선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10년 동안 일관된 생활을 했다. 어느 날 그의 사승이 나부산(羅浮山)으로 이주해 가는데 그의 뒤를 따르려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도신은 하는수 없이 완공산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신이 무명의 선승에게서 선법을 배웠다고 하는 년대는 수(隋) 문제(文帝)의 개황(開皇) 12년(592)에서 인수초년(仁壽初年:601)까지 10여 년으로 볼 수 있다.
수 문제가 천하를 통일한 후 북주(北周)의 폐불(廢佛)로 인해 황량해진 사원의 복구를 명령했던 때이다. 다시 말하면 수(隋)의 문제(文帝)가 남북(南北)의 문화통일(文化通一)을 지향했던 시기였다.
문제(文帝)는 칙령(勅令)을 내려 오악(五嶽)에 불교사원을 건립하게 한 후 제현(諸縣)에 승니양사(僧尼兩寺)를 건립토록 했다. 문제는 또 전장(田莊)을 하사하고 대흥국사(大興國寺)라는 명칭의 절을 45개 현에 세웠다.
인수초년으로부터 전후 세 차례나 전국 각지에 사리탑(舍利塔)을 세운후 천하의 고승(高僧)을 각지에 파견했다. 승니 23만명을 출가득도하도록 했으며 3.792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도신(道信)의 출가 역시 이와 같은 수(隋) 문제(文帝)와 양제(煬帝)의 흥불사업(興佛事業)의 은도(恩度)에 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인수초년(仁壽初年)에서 대업(大業) 3년 사이에 전개된 일로 볼 수 있다. 대업 3년은 도신이 27세가 되는 해이므로 도신의 출가도 역시 이 무렵일 것이다.
도신은 득도(得道)후 길주사(吉州寺)로 배치되었지만 길주사가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제에 의해서 전국에 지어진 관사(官寺)의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속고승전>에 기록된 도신의 감통기사(感通記事)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길주성이 70일간이나 도적들에게 포위되었다. 성중의 우물이 모두 말라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신이 길주사에 도착하자 우물에서 물이 솟아올랐다. 뿐만 아니라 도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도신에게 듣게 되었다. 성중의 모든 사람에게 큰소리로 반야를 암송하도록 했다. 그러자 도적들은 허둥지둥 물러갔다."
도신은 형악(衡岳)으로 가려고 강주(江州)에 이르렀을 때 그곳 도속(道俗)의 요청으로 노산(盧山)의 대림사(大林寺)에 주석했다. 도신은 대림사에서 도적들에게 시달리면서도 10동안이나 머물렀다. 노산은 혜원(慧遠;334~416)이 염불결사를 일으켰던 유서깊은 곳이다.
도신은 수 양제(煬帝)의 대업(大業) 6년부터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3년까지 대림사에 주석했다. 이 기간은 수(隋)에서 당(唐)으로 변화하는 대역사적(大歷史的)인 정변기(政變期)였다. 그후에도 황매현(黃梅縣) 사람들이 사원을 건립하여 주석해 주기를 원했지만 의연한 자세로 산행을 계속했다.
도신은 쌍봉산(雙峯山)에 이르러 호천석(好泉石)을 발견한 후 그곳에 주석하기로 결심했다. 도신이 쌍봉산에 주석하자 제주(諸州)로부터 학도자(學道者)들이 모여들었다. 30여년 동안 그곳에 주석했는데 중국불교사상(中國佛敎史上) 최초로 울연(鬱然)한 수도자(修道者)들의 집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도신의 쌍봉산 입산은 정관원년(貞觀元年:627)으로 그의 나이 47세 전후가 된다.
쌍봉산에서 도신이 30년 동안 펼친 행화는 널리 알려졌다. 그 당시에는 출가자들만을 위한 행화가 아니라 재가의 고위 관직들에게까지 폭넓게 이루어졌다. 최의현(崔義玄:586~656)은 도신에게 귀의한 관직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신은 임종(臨終)에 이르러 제자 홍인(弘忍)을 불렀다.
"나를 위하여 탑을 만들도록 하라. 나의 목숨은 오래지 않을 것이다"
도신은 홍인에게 자신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알린 연후에 탑을 쌓도록 했다.
대중들이 도신에 물었다.
"스님은 어찌 부촉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도신은 흔연히 답변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촉한 바 적지 않다."
도신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입적했다.
도신의 임종과 제자인 홍인에게의 부촉의 사실은 이로써 명백해졌다.
도신이 입적했을 때 산중의 5백여 대중과 제주(諸州)의 도속(道俗)이 모두 암명(闇冥)에 휩싸였다. 쌍봉산을 둘러싼 삼리(三里)의 수엽(樹葉)이 모두 하얗게 변했다. 요사채 옆의 오동나무는 가지를 굽혀 도신의 방을 향했다. 그때 굽은 오동나무가 지금까지도 말라비틀어진 채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자(이인)의 죽음에 대해서 산천(山川)이나 천지(天地)가 슬픔을 표명한 기이(奇異)의 사실을 전하고 있다.
도신의 입적(入寂)은 영휘(永徽) 2년(652), 윤(閏) 9월 4일로서 그가 72세에 이르렀을 때이다. 도신이 입적한 다음 해, 제자인 홍인이 도신의 탑을 열어보니 열반시의 단좌(端坐)했던 그대로 의연히 앉아 있었다. 홍인 이외의 도신의 제자는 현섬과 법현(法顯)과 선복(善伏)이 유명하다.
도신의 제자 현섬(?~652)은 속성이 유씨이다. 하남성 남양부 사람으로 쌍봉산의 도신선사를 심방하고 도를 가르쳐 줄 것을 간청했다. 도신에게서 도를 배운 후 고향에 돌아가 장좌불와(長坐不臥)하며 오로지 선정(禪定)에 힘썼다. 동향(同鄕)의 사문(沙門) 능법(稜法)과 함께 선원(禪院)을 열어 행화(行化)하다가 영휘(永徽) 3년(652)에 천화(遷化)했다.
형주(荊州) 사층사(四層寺) 법현(法顯:576~652)은 속성이 정(丁)씨이고 湖北省 荊州府 사람이다. 12세에 출가하여 天台智의(538~597)로부터 선(禪)을 배운 다음 도신에게 수학했다. 법현은 하룻밤 꿈속에서 이상한 노승으로부터 "쌍봉산으로 가서 도신선사에게 배우도록 하라"는 말을 듣고 쌍봉산 도신을 찾아 본심을 맑혔다고 한다. 그는 사층사에 50년이나 주석하며 두문불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선복(善伏:?~660)의 속성은 장(蔣)씨이며 상주의흥(常州義興)사람이다. 삼론(三論)과 천태(天台)를 배운 다음 쌍봉산 도신에게 사사했다. 선복은 제방을 유행하다가 현경(顯慶) 5년에 형악(衡嶽)에서 입적(入寂)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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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宗四祖 道信(580~651)

禪宗第四祖。嗣法於僧璨,傳於弘忍。?州廣濟(湖北廣濟)人,俗姓司馬。據景德傳燈錄卷三載,師於幼時?慕空宗諸解脫門而出家,隋開皇十二年(五九二),入舒州?公山參謁僧璨,言下大悟,奉侍九年(一說十年),得其衣?。大業十三年(六一七),領徒?至吉州廬陵,遇群盜圍城七旬,其時泉井枯?,?皆憂懼,師乃勸城中道俗念摩訶般若;盜賊遙望城,如有神兵守之,相謂曰:「城內必有異人,不可攻矣!」遂解圍而去。

後師欲往衡岳,路出江州,道俗請留廬山大林寺。唐武德七年(六二四),歸?州,住破頭山三十餘年,大振法道,學侶雲集。一日往黃梅縣,途逢一骨相奇秀之小兒,異乎常童。師問曰:子何姓?答曰:姓?有,不是常姓。師曰:是何姓?答曰?是佛性。師曰?汝無性耶。答曰:性空故。師默識其法器。??侍者至其家,於父母所乞令出家。父母以宿緣故殊無難色,遂捨?弟子。名曰弘忍,以至付法傳衣是?五祖。?有弟子法融別立「牛頭禪」。又破頭山後改稱雙峰山,故世人又稱師?「雙峰道信」。

貞觀十七年(六四三),太宗聞其道風,三詔入京,師均上表辭謝,帝乃遣使,謂若不起,命取首級,師伸頸就刃,神色儼然,使者異之,還入奏,帝愈歎慕,賜珍繒。永徽二年閏九月(一說永徽元年)垂誡門人,安坐而寂,世壽七十二。建塔於東山黃梅寺。因弟子弘忍居於黃梅東山弘傳禪法,故世人?稱師與弘忍之道法?東山法門,?遙尊師?東山法門之初祖。大曆(七六六~七七九)年中,唐代宗?諡「大醫禪師」,塔銘號「慈雲」。著有《入道安心要方便法門》、《菩薩戒作法》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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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선종의 5조 홍인(弘忍)

동산법문(東山法門)은 홍인(弘忍:601~674)이 쌍봉산(雙峯山) 동봉(東峯) 빙무산에 이주하여 크게 홍법(弘法)했기 때문에 붙여진 호칭이다. 따라서 동산법문은 도신과 홍인의 선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도신(道信)의 쌍봉산선문(雙峯山禪門) 개창과 더불어 수선(修禪)의 교단으로 그 토대를 구축한 전기가 바로 동산법문이다.
5백여인의 도신선문보다 많은 천여인의 대중이 동산법문에 운집했다. 그런데다 홍인의 문하에서 10대 제자를 비롯한 다재(多才) 명승(名僧)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동산법문은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홍인은 근주 황매현(黃梅縣) 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주(周)씨. 12세에 동진(童眞)으로 출가했다는 설과 7세에 도신(道信)을 찾아 쌍봉산(雙峯山) 유거사(幽居寺)에 출가했다는 양설이 있으나, 12세 때 노산(盧山) 대림사(大林寺)에 주석했던 도신에게 출가한 것이 사실에 가까운 기록이다.
홍인은 입이 무겁고 생각을 깊게 하는 중후한 성품을 지닌 사고형의 수행자(修行者)였다. 도신은 작무(作務)에 힘쓰고 자기의 몸을 낮추는 겸손한 인품의 소유자인 홍인을 보자 이내 법기(法器)로 인정했다.
홍인은 도신의 가르침에 따라 낮으로는 노역(勞役)에 힘쓰고, 밤으로는 새벽까지 좌선(坐禪)에 열중했다. 홍인이 낮으로 노무에 열중했다는 것은 선승들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초기선종에 있어서의 노무(勞務)는 좌선과 똑같은 수도행(修道行)으로서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초기선종(初期禪宗)의 노무는 청규(淸規)로서 성문화(成文化)한 백장청규(百丈淸規)의 보청법(普請法)의 원류가 되는 셈이다.
모든 일을 게으르게 하지 않는 홍인을 도신이 진심으로 지도하자 통연(洞然)한 자각이 불시에 찾아들었다. 홍인이 경론(經論)을 보지 않았다고 하지만 한번 들으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넣었다.
능가경의 전통적 전수자로서의 이름이 알려진 홍인은 능가경의 현리(玄理)를 설하는 선양자(宣揚者)로 우뚝하다.

도신선사가 홍인에게 물었다.
"그대의 성(姓)은 무엇인가?”
홍인은 이렇게 답변했다.
“성(姓)은 있지만 항상하는 성(姓)은 아닙니다.”
도신선사가 다시 물었다.
“무슨 성(姓)인가?”
“불성(佛性)입니다.”
“그대는 어찌 성(姓)이 없는가?”
“성(性)은 공(空)한 까닭입니다."

도신과 홍인의 선법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한다. 홍인이 주석한 빙무산(馮茂山)이 도신이 머물렀던 쌍봉산의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홍인의 선법의 두 가지 특징은 선농겸수(禪農兼修)와 <능가경>의 중시다.

<전법보기>에 따르면 홍인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좌선하여 새벽에 이른다”고 했다.
수선과 노동을 둘로 보지 않고 병중(竝重)하여, 수행을 일상의 영역으로 확대했다.
“행주좌와가 모두 도량이고, 삼업(三業: 身口意)이 모두 불사(佛事)이다”라고도 했다.
이것은 조사선의 의취를 정확하게 나타낸 언표이다.
“선(禪)이 곧 생활이다”라는 선가의 취지와 사상의 연원을 표현한 것이다.

“왜 깊은 산속에서 선수행을 하는가?”라고 홍인에게 물었다.
“동량(棟梁)은 깊은 산속에서 나온다”라고 대답했다.
산중에서 좌선을 통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홍인의 선사상은 도신을 이어 좌선간심에 의한 “수본진심(守本眞心)”을 강조하고 있다.
최상승론(最上乘論)에서 “행주좌와 가운데서 항상 요연히 본래 진심을 지켜(守本眞心) 망념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멸한 바를 깨달으니 일체 만법은 스스로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수본진심(守本眞心)은 도신의 수일불이(守一不移)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중도불성의 마음을 지키는 것을 수본진심이라 정의하고 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제일의 도>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이란 스스로 청정한 진심을 깨닫는 것이므로 수본진심이라 했다.

홍인은 구체적인 좌선수행법으로 ‘일자간(一字看)’과 ‘일상관(日想觀)’을 제시하고 있다.
<능가불인법지>에 다음과 같은 일절이 보인다.
“여기 한 채의 집이 있는데 그 안에 똥과 초토가 가득하다.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똥과 초토를 남김없이 다 소제하여 한 물건(一物)도 없는데,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간화선적인 요소가 짙은 선문답의 일절인데, 한 물건(一物)이 무엇인가? 라고 의심하고 있다.
홍인으로부터 많은 전법제자(소위 10대 제자)가 배출 되는데, 그 가운데 신수와 혜능이 나와서 남종선 북종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홍인의 선사상(禪思想)은 선법일본(禪法一本)에 나타나 있지만 <능가사자기>의 저자인 정각(淨覺)은 <선법일본>이 홍인의 저술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정각이 이와 같이 언급한 이유는 능가 불인법지(佛人法志)를 이어받은 홍인이 어디까지나 달마-혜가 이래의 능가경의 전수자로서 초기선종의 전통을 계승한 조사(祖師)였다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함에 있다.
홍인의 이름을 붙인 선법일본(禪法一本)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수심요론(修心要論) 혹은 일승현자심론(一乘顯自心論)으로 일컫는 최상승론(最上乘論)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수심요론은 현재 9종의 이본(異本)이 알려져 있으며, 따로 최상승론(最上乘論) 제5조 홍인대사설(弘忍大師說)이란 제명으로 선문촬요(禪門撮要)에 수록되어 있다.
홍인의 수심요론에 나타난 중심사상은 수심(守心) 혹은 수진심(守眞心) 수본진심(守本眞心)의 설법이다. 이것은 홍인일대(弘忍一代) 선사상의 중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수심요론의 구절마다 수심(守心) 수진심(守眞心)을 강조한다.
수심(守心)의 일법(一法)이야말로 열반(涅槃)의 근본이요 입도(入道)의 요문(要門)이며, 12부경전의 본질이며, 삼세제불의 우두머리가 된다고 강조한다.
(欲知法要 守心第一 此守心者 乃是涅槃之根本 入道之要門 十二部經之宗 三世諸佛之祖)
홍인이 말하는 수심은 자기의 청정한 불성을 확인하고 잘 지키라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홍인은 수심의 실천방법으로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의한 좌선법(坐禪法)을 설하고 있다. 16관법중 일상관(日想觀)과 수심(守心)을 결합하여 홍인(弘忍) 독자의 수심(守心)의 좌선법(坐禪法)을 설하고 있다.
홍인은 삼계허환유시일심작(三界虛幻唯是一心作)을 주장했다. 삼계 허망이나 삼계 허위라고 하는 곳에 머무른 채 유심을 진심으로 할 수 없음을 언급했다. 홍인이 인용한 유시일심작(唯是一心作)은 수본진심(守本眞心) 수심(守心)의 입장을 말함이다.
홍인은 수도(修道)의 근본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불생(不生) 불멸(不滅)하며 분별 없는 자기의 본래 청정(淸淨)한 마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바로 본사(本師)이며 제방의 제불(諸佛)을 호념(護念)하는 것보다 수승(殊勝)하다고 언급한다.
홍인이 주장한 수본진심설(守本眞心說)의 사상적 근거가 되는 것은 자성본래청정심(自性本來淸淨心)인 견지(見地)이다. 이것은 홍인이 수심요론(修心要論)에서 주장하는 일체중생청정지심(一切衆生淸淨之心) 혹은 진여불성자성청정(眞如佛性自性淸淨)을 강조하는 점에서 입증된다.
초기선종의 성립시기에 도신(道信)과 홍인(弘忍)이 조성한 성과는 말 할 수 없이 크다. 특히 초기선종의 기틀을 굳게 세운 동산법문(東山法門)의 시대(時代)를 제외하고서는 중국불교에 있어서 선종(禪宗)의 성립사(成立史)을 기술하기 어렵다. 홍인의 동산법문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중국의 남과 북 각지로 진출하여 홍인의 교지를 확산함으로써 선종(禪宗)이라는 새로운 실천불교(實踐佛敎)의 응집체가 여기저기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사물을 보는 관점과 논리체계를 뒤로하고, 좌선(坐禪)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집단의 형성은 쌍봉산문의 개창과 동산법문의 융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눈보다 지금 여기에 살아서 숨을 쉬는 수선자(修禪者)의 눈을 귀중하게 여기는 선종의 입장이 홍인문하의 뛰어난 제자들에 의해서 중국 전지역에 널리 알려지고 공감을 얻게 된 것은 중국불교의 새로운 진로를 여는 전기가 되었다. 특히 홍인의 제자 중에서 제도불교(帝都佛敎)를 지도한 도안(道安:582~709)이나 신수(神秀:606~706)는 홍인의 실천적인 수행생활에 토대를 둔 교시와 지도에 따라서 인격이 도야(陶冶)된 대표적 인물이다.
능사사자기의 홍인장(弘忍章)에는 홍인이 추구했던 독특한 인재양성방침이 기재되어 있다.

人問, 學道何故不向城邑聚落, 要在山居. 答曰, 大廈之材 本出幽谷, 不向人間有也. 以遠離人故, 不被刀斧損破, 一一長成大物後, 乃堪爲棟梁之用, 故知栖神幽谷, 遠避俗塵, 養性山中, 長辭俗事, 心自安寧, 從此道樹花開, 禪林菓出也.

"도를 배움에 있어서 도시의 촌이나 읍에서 하지 않고 산중에서만 해야 되느냐?"고 어떤 사람이 물었다. 홍인은 이렇게 답변했다.
"훌륭한 집을 지을 목재는 심산유곡에서 나오는 법이지 세간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칼이나 도끼에 상하는 일이 없어서 하나하나가 훌륭한 재목으로 자란 연후에 꼭 필요한 곳에 동량으로 사용될 수 있다. 산림유곡에 거주하며 속진을 피하여 산중에서 본성을 양육시키면서 속사를 끊어버려야 한다. 눈앞에서 일물도 없어졌을 때 마음은 스스로 안녕(安寧)되며, 그로부터 도의 나무에 꽃이 피고 선림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쌍봉산의 깊숙한 선림(禪林)인 동산(東山)의 홍인문하에서 수행하여 인물로 성장한 산간의 구도자들이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에서 세인의 동량이 된 사실을 전제로한 내용이다. 세상의 동량이 된 뛰어난 인재의 배출은 홍인의 독특한 지도방침에 따른 수행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돈황본 <육조단경>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산법의 교단에는 문인이 천여인이나 된다."
종밀(宗密)이 쓴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초)에도 만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수많은 대중이 쌍봉산 한곳에 모여서 집단적인 수도생활을 실행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선종사적인 입장은 물론 중국불교사상의 획기적인 대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이후의 중국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도 평가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
달마나 혜가 그밖의 능가사들 몇몇이서 실행했던 두타행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초기선종의 교단구성으로 보아야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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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宗 五祖 弘忍(602~674)

禪宗第五祖。?陽(江西九江)人,或謂?州(湖北?春)黃梅人,俗姓周。七歲,從四祖道信出家於?州黃梅雙峰山東山寺,年十三,正式剃度?僧。在道信門下,日間從事勞動,夜間靜坐習禪。道信常以禪宗頓漸宗旨考驗他,他觸事解悟,盡得道信的禪法,永徽三年(六五二)道信付法傳衣,遂得其心傳,同年九月道信圓寂,由他繼承法席,世稱「五祖黃梅」,或僅稱「黃梅」。因?四方來學的人日多,便在雙峰山的東面馮茂山?建道場,名東山寺,時稱他的禪學?東山法門。咸亨二年(六七一),傳法於六祖惠能。

中國禪宗從初祖菩提達摩到三祖僧璨,其門徒都行頭陀行,一衣一?,隨緣而住,?不聚徒定居於一處。到了道信、弘忍時代,禪風一變。道信於唐?武德(六一八)初入黃梅雙峰山,一住三十餘年,會?多至五百。後來弘忍移居東山,又二十餘年,徒?多至七百人,這兩代禪徒都定住一處,過著集體生活。他們實行生?自給,把運水、搬柴等一切勞動都當作禪的修行;弘忍?認?學道應該山居,遠離?塵。這是後來馬祖、百丈等於深山幽谷建立叢林,實行農禪生活的指導思想。

唐?顯慶五年(六六0),高宗遣使召弘忍入京,他固辭不赴;乃送衣藥到山供養。龍朔元年(六六一),弘忍令會下徒?各作一偈,以呈見解,若語契符,?以衣法相付。上座神秀先呈偈說?「身是菩提樹,心如明鏡台;時時勤拂拭,莫使惹塵埃!」惠能?作一偈?「菩提本無樹,明鏡亦非台,本來無一物,何處惹塵埃。」弘忍以惠能見解透徹,遂授以衣法,叫他南歸。咸亨五年(六七四)十月二十三日,弘忍圓寂,年七十四,葬於東山之岡。開元中(七一三~七四一)學士閭丘均?撰塔碑。代宗時(七六三~七七九)諡?「大滿禪師」。

弘忍的禪學傳自道信。道信自說他的法門?一依《楞伽經》以心法?宗,二依《文殊般若經》的一行三昧。弘忍常說?「欲知法要,心是十二部經之根本。」又說?「諸佛只是以心傳心,達者印可,更無別法」。這是他繼承道信以心法?宗的設施。又弘忍評神秀的造詣說?「吾與神秀論《楞伽經》,玄理通快。」神秀後來答武則天問東山法門依何典誥時說?「依《文殊般若經》一行三昧」(見《楞伽師資記》)。由此可知弘忍和道信的思想是一貫的。又道信說一行三昧的修法,引《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欲入一行三昧,應處空閒,捨諸亂意,不取相貌,繫心一佛,專念名號,隨佛方所端身正向。能於一佛念念相續,?是念中能見過去、未來、現在諸佛,(中略)...如是入一行三昧者,盡知恒沙諸佛法界無差別相。」。弘忍也繼承了這一思想,?他的門下建立念佛禪的理論根據。

弘忍的著作,未見記載。僅《楞伽師資記》及《宗鏡錄》等,散錄其法語。《楞伽師資記》且說弘忍常蕭然靜坐,不出文記,只是口說玄理,默授與人。因此世傳有《禪法》一本,云是弘忍禪師所說,是不確實的。但古來傳有《最上乘論》(一稱《修心要論》)一書,題?「第五祖弘忍禪師述」,朝鮮、日本都有刻本。論中設立問答,闡說守本?心?涅槃根本、入道要門、十二部經之宗和三世諸佛之祖。又說?「若有初心學坐禪者,依《觀無量壽經》,端坐正念,閉目合口,心前平視,隨意近遠,作一日想,守?心,念念莫住。」這比弘忍原來說法似更有發展,當是後人所作。
弘忍會下的徒?極多。其及門弟子,據《楞伽師資記》和《歷代法寶記》所載有十一人,《景德傳燈錄》所載有十三人,宗密的《圓覺經大疏?》及《禪門師資承襲圖》所載有十六人,總計見於記載約二十五人。其中以神秀及惠能二師分別形成北宗禪與南宗禪兩系統;至後世,分衍出更多宗派。
禪宗自初祖菩提達摩至唐代弘忍之傳承,?後世禪宗各派所承認。弘忍繼此傳承,發揚禪風,形成「東山法門」,禪宗傳?自楞伽經改?金剛般若經?自其始。弘忍之思想以悟徹心性之本源?旨,守心?參學之要。達摩一系的禪學,也可說從弘忍門下始發展成?一大宗派。而盛傳其法的,首推惠能和神秀。惠能宗《般若》,開法於南方;神秀宗《楞伽》,傳禪於北方,成?南頓北漸二系禪學的首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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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선종의 제6조 혜능

혜능(慧能: 638~713)의 본관은 범양(范陽: 지금의 河北省 啄縣)이며 속성은 노(盧)이다. 가세에 따라 영남 신주(新州: 지금 廣東省 新興縣)로 이주했다. 부친을 여읜후 홀로된 어머니를 봉양하며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 때 우연히 불교신도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독경 소리를 듣고(一聞經語) 깨달은 바가 있었다(心卽開悟).
신회어록은 육조 혜능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22세에 기주 황매산으로 들어가 5조 홍인을 참문한 후 사람은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남북이 없다고 하는 홍인과의 문답으로 입실하게 되었다."
혜능이 간파한 불성평등사상(인간불교사상)은 “사람이 곧 부처(卽人是佛)”라는 조사선으로 발전한다.
혜능은 홍인의 문하에서 8개월간 방앗간에서의 작무와 수행을 병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인이 설파한 금강경의 해설을 듣게 된다.
“아무런 저의없이 순수하게(應無所住),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라(而生其心)”고 하는 말끝에 여래지견(如來知見)을 깨닫고 초기선종의 6조로 부촉을 받게 된다. 혜능이 홍인의 말 한 마디에 깨달았다[言下大悟]는 이 내용이 남종(南宗)이 제창한 돈오선(頓悟禪)의 수증방법이 된다.
돈황본 단경에는 “불성은 항상 깨끗하다(佛性常淸淨)”거나, 훗날 수정본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는 게송의 구절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時時勤拂拭)”는 신수의 게송(偈訟)에 대응해서 창안된 것이다.
신수가 경론에 근거를 둔 체계적인 점수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깨달음의 경계를 언급했다면, 혜능은 번뇌와 보리가 본래 둘이 아님을 인식한 나머지 닦음 없는 닦음(妙修)이 현전한다는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하고 있다.
혜능은 선을 “스스로 그러한 본바탕(自然體)”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고요함(寂滅性)에 앉아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 닦음을 폐기하고, 실천행을 방기하는 선류(禪類)들에게 중도정관(中道正觀)에 근거한 중도정행(中道正行: 반야바라밀행)의 실천을 주장한다.
신수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라”고 한 게송이 제도불교의 귀족적 점수선(漸修禪)의 상징어라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하는 것은 서민을 중심으로 한 돈오선(頓悟禪)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혜능이 행자의 신분으로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하여 육대 조사가 되었다는 입도기연(入道機緣)은 점수를 중핵으로 하는 북종(北宗)의 권위와 체계를 파기함과 동시에 남종(南宗)이 돈오선 사상을 수립하는 전기로 보아야 옳다. 다시 말하면 북종과 남종의 종파적 대립상의 반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혜능의 남종선은 달마로부터 신수에 이르는 초기선종의 점수적 수증방법에 번뇌와 보리의 이원화(二元化)적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번뇌가 보리라는 관점과 번뇌와 보리가 둘이라는 관점은 아주 큰 격차를 불러온다.
혜능의 남종은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을 좌(念不起爲坐)라 하고, 본성을 보아 어지럽지 않음이 선(見本性不亂爲禪)”이라는 <좌선(坐禪)의 관점>에서 <번뇌가 보리(煩惱卽菩提)>라는 일원적(一元的) 돈오선관(頓悟禪觀)을 표명한다.
북종(北宗)이 점수를 통한 돈오를 주창함은 몸을 중심으로 한 좌선을 위주로 하여 마음을 조복하려함이라면, 남종(南宗)은 돈오를 통한 점수를 통합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음의 조복을 강조한다. 정신과 육체, 몸과 마음의 회통과 통합을 강조한다.
신수와 혜능은 같은 홍인 문하에서 도신과 홍인의 동산법문을 계승했지만, 수증가풍과 생활환경의 차이로 인해 신수선은 점문(漸門)을 혜능선은 돈문(頓門)을 강조하게 되었다.
혜능이 단경을 통해 주창하고 있는 돈오선의 중핵은 <돈오자성청정(頓悟自性淸淨)에 의한 일념해탈(一念解脫)을 내용으로 하는 돈오성불(頓悟成佛) 사상과 정혜불이(定慧不二) 생활상의 전개인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의 실천>이다.
이른바 <돈오자성청정>은 중생 스스로 성품이 청정함을 단박 깨닫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청정하다는 것은 실체가 없어 공(空)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또한 식심견성(識心見性)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마음이 본래 실체가 없고 성품이 본래 공(空)함을 요달하는 것을 말한다.

돈오자성청정을 주창한 까닭은 일반적인 서민이나 평민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보문(普門)에 있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신수의 선은 낙양을 중심으로한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문호를 개방하여 누구나 선문에 올 수 있도록 수증가풍을 혁신한 것이다.

우리의 정신(마음)은 인식 주체인 안이비설신의와 인식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의 만남에 의한 인식 활동의 세계[十八界]를 지칭한다. 인식 주체가 공하고 인식대상 또한 공하므로 그 결과인 인식활동은 공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실체가 없는 마음을 부여잡고 희로애락(喜怒哀樂)하는 것이 중생의 집착상인 것이다. 마음이 본래 실체가 없음(空)을 단박에 깨달으면(頓悟) 바로 안심입명(安心立命)에 도달한다.
중생은 세간상(世間相)에 이끌리어 상(相)이 상아님(非相: 空)을 보지 못한다. 즉 상(相)에 붙잡혀 상(相)의 공(空)한 성품(性)을 보지 못한다. 그로인하여 경계에 집착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
상을 보아(見相) 상에 미혹되면 중생이요, 성을 보아(見性) 성이 공함(性空)을 깨달으면 부처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相)을 보는 동시에 성(性)을 보며, 성(性)을 보는 동시에 상(相)을 본다. 언제나 중도정관(中道正觀)을 실천한다. 생각 생각에서 중도정관을 실천하면 일념해탈(一念解脫)이요 돈오성불(頓悟成佛)이다.
초기선종의 가르침에 의하면 먼저 선정을 닦아 그 선정으로부터 지혜를 발현한다고 하지만 혜능은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닌 정혜불이(定慧不二)의 관점에서 무수지수(無修之修)를 강조했다.
혜능은 선정(禪定)을 등불에 비유하고, 지혜는 그 등불에서 발하는 빛에 비유하여 등불이 곧 빛임을 들어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정혜불이의 관점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수증론을 주장한 것이다. 선정을 닦음이 바로 지혜의 발현이요, 지혜의 발현이 선정의 닦음이 되므로 선정과 지혜를 둘로 보아 정으로부터 혜를 발현한다(由定發慧)는 관점을 비판했다.
정혜불이 사상은 일상 생활상에서 무념, 무상, 무주의 수행으로 전개되었다.
단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돈오선은 <무념으로 종지를 삼고(無念爲宗), 무상으로 본체를 삼으며(無相爲體), 무주로 근본을 삼는다(無住爲本)>고 했다.
무념(無念)이란 아무 생각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하되 생각하지 않음(念而不念)>이라고 정의하고, 일체 경계에서 오염(집착)되지 않음이 곧 무념인 것이다.
무상(無相)은 <상에 있되 상을 여읨(於相而離相)>을 말하는데, 일체 모든 형상은 모두 허망한 것이요, 만법은 모두 심성(마음)으로 인하여 존재하는 것인데, 심성은 허공과 같아 실체가 없으므로 무상(無相)이다.
성품의 본체는 청정(空)하여 무상실상(無相實相)이다. 밖으로 일체 상을 떠나면 자성의 본체는 청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상으로 본체를 삼는 것이다.
무주(無住)란 사람의 본성으로 생각 생각이 일체법에 머물지 않음을 가리킨다. 만약 한 생각이 머물면 생각 생각이 머물러 속박된다. 그러므로 <머문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고 주창한다.
홍인과 혜능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법(傳法)과 부촉은 돈황본(敦煌本) 육조단경(六祖壇經)이 골격을 이루고 있지만, 혜능(惠能)과 신수(神秀)와의 심게(心偈)를 둘러싼 이야기의 전개는 이상한 면을 들어내고 있다.
혜능이 홍인의 문하에 들어온지 여덟달밖에 되지 않은 행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교수사(敎授師)인 신수(神秀)를 능가할 수 있는 글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무식한 나무군으로서 날마다 작무에 허덕였던 혜능이 어떻게 박학다식한 신수를 능가할 수 있었으며 신수보다 먼저 견성(見性)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만일 혜능이 신수보다 먼저 홍인의 불법을 체득했다면 그것은 수정주의적(修定主義的)인 명상의 수행과는 전혀 이질적인 색다른 선(禪)이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혜능의 선은 신수의 선과 전혀 다른 선이었음을 시사한다.
혜능의 선이 신수의 선과 다른 선이었다면 그것은 결국 홍인의 선과도 다를 것은 물론이며 초기선종의 보리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이 추구했던 수정주의적 명상과 전혀 다른 선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혜능의 선은 초기선종에서 추구했던 좌선방편(坐禪方便)의 수정주의(修定主義)에서 탈피하여 자성(自性)을 깨닫는 견성선(見性禪)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혜능에 이르러 초기선종의 능가주의를 버리고 반야주의로 일전했다는 것은 당조(堂祖)의 사조(思潮)가 귀족적인 사조에서 서민적인 사조로 전환(轉換)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중국불교에 있어서 선(禪)의 개념이 눈밝은 신회(神會)에 의해서 반전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야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견성선(見性禪)의 돈오사상(頓悟思想)을 제창함으로해서 삼학일체(三學一體)의 전불교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신회(神會)의 깊은 의도를 감지해야 한다.

초기선종에서는 능가주의와 이입사행을 중심개념으로 하는 좌선방편의 선을 정립시켰다면 혜능의 선종에서는 금강경을 중심으로한 반야주의의 실천을 근간으로 하여 선의 개념을 정립시켰다고 보아야 옳다. 이것은 결국 혜능의 선은 초기선종의 선과 궤를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내용중에서 혜능이 나무를 팔려고 갔다가 금강경의 독송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은 하나의 복선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왜 하고많은 경전중에서 금강경의 일구에 눈이 열리느냐는 것이다. 당시에 선문에서 유행했던 경전은 능가경이었을 것인데, 왜 금강경의 일구를 등장시켰으며, 각계 각층의 인재들이 수두룩할텐데 왜 무식한 나무장수를 주인공으로 선발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기존의 유식하고 귀족적인 선불교에서 탈피하여 대단히 서민적이며 일상적인 작무를 수행하는 일반계층으로 선을 확대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야 옳다.

육조단경의 서두에 혜능이 금강경을 대하는 순간 심기의 변화를 느끼고 홍인의 문하로 들어가 여덟달이나 작무에 투여되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선의 개념이 일전되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신회는 혜능의 선이 신수의 선과 다르리라는 것을 미리 예시하기 위해서 반야주의의 예봉에 해당되는 금강경을 등장했다고 보아야 옳다.
신회는 반야주의의 선사상을 구현할 실행자로서의 전형적 인물을 혜능으로 선택했다. 일상의 노동생활을 통해서 불법의 진수를 깨닫고 스스로의 육신을 움직여서 불법의 대의를 발현하여 진보적인 새로운 시대의 선불교를 제창하고 싶어 했다.
신회는 반야주의 선사상을 구현할 수 있는 선구자를 선택하여 대중들 앞에 내세우고자 했다. 신수가 선도하는 도회중심의 귀족불교 보다는 디딜방아를 찓는 노동생활을 통해서 불법의 진수를 체득한 혜능을 남종(南宗)의 조(祖) 육조(六祖)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 또한 그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는 신회어록(神會語錄)의 혜능전(惠能傳)을 인용하여 혜능의 근기와 행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덟달 동안 디딜방아를 밟은 혜능의 근기는 대단히 수승했다는 것과 달마소전(達摩所傳)의 가사를 홍인으로부터 수여받고 즉시 그곳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혜능은 홍인의 곁을 떠나 17년 동안 은거생활을 했다. 무엇 때문에 은거생활을 17년이나 했는지 그 이유는 밝혀진바 없다.
혜능은 남해(南海)의 제지사(制止寺)에 이르러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는 인종법사(印宗法師:627~713)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유명한 풍번(風幡)의 이야기다.
역대법보기에 기록된 <풍번의 이야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연히 남해의 제지사에 이르러 인종법사의 <열반경>을 강의하는 회상을 만났다. 혜능(惠能)은 인종법사의 강의를 경청했다.
인종법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모두 바람이 깃발을 흔들고 있음을 보게! 윗쪽에 깃발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대중이 말했다.
"움직이고 있다."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또 한 사람이 말했다.
"깃발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사람이 또 말했다.
"이것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며 다툼을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앉아 있던 좌석에서 일어나 인종법사에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의 망상심이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법(法)에는 동(動)과 부동(不動)이 없다."
인종법사는 혜능의 이 말을 듣고 경악하여 망연자실했다. 인종은 혜능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인종법사가 혜능에게 물었다.
"거사는 어디에서 왔소?"
혜능이 답변했다.
"본래 온 것도 아니요 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종법사는 법상(法床)에서 내려와 혜능을 방안으로 안내한 다음 자세하게 물었다.
혜능이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했다. 동산(東山)의 불법과 전신(傳信)의 가사를 부촉받은 전후사를 설명했다.
인종법사는 혜능의 설명을 듣고난 후 머리를 숙여 예를 표현한 다음 감탄하여 말했다.
"어찌 기약인들 할 수 있었으랴! 좌하(座下)에 대보살(大菩薩)이 있을 줄을!"
말을 맺은 인종법사는 다시 정례를 표한 다음 혜능을 청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인종법사는 스스로 혜능의 제자라고 자칭했다.
인종법사는 혜능선사를 위하여 머리를 깎아 출가하게 하고 가사를 입혔다.
"좋은 일이고 반가운 일이다. 황매(黃梅)의 홍인대사(弘忍大師) 불법(佛法)이 영남에 퍼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이곳에 있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모든 대중이 모른다고 말했다.
인종법사가 말했다.
"내가 설한 법문은 기왓장과 같다. 혜능선사가 홍인법사(弘忍法師)의 법을 이었으니 비유하자면 진금(眞金)과 같다. 참으로 심오하고 부사의(不思議)하다고 말해야 옳다."
인종법사는 대중과 함께 혜능선사의 발아래 정례하고 홍인소전(弘忍所傳)의 가사를 보여 줄 것을 간청했다.
인종법사는 혜능선사로부터 직접 보살계를 받았다. 그런 다음 인종법사는 대중과 함께 혜능선사를 전송했다.
혜능선사는 조계(曹溪)에 돌아와 널리 선법을 개연(開演)했다.
천하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조계의 불법은 부사의(不思議)하다고 말했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기록된 <풍번(風幡)의 이야기>는 조계대사전(曹溪大師傳)에 이르러서는 변화를 나타낸다.
전의부법(傳衣付法)의 강조와 함께 열반경(涅槃經)에 의한 문답도 더욱 자세하게 꾸민다.
신회어록(神會語錄)의 육조혜능전(六祖惠能傳)에는 인종과 만난 사례와 법성사(法性寺) 즉 제지사(制止寺) 계단(戒壇)에서의 수계(受戒)에 관한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홍인으로부터 대법과 가사를 받은 혜능은 양자강을 건너 소주(韶州)의 조계(曹溪)에 돌아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조계에 돌아온 혜능은 40년을 금강경(金剛經)에 의거하여 여래의 지견을 열어 대중 교화에 진력했다. 소주의 조계야말로 혜능의 행화지(行化地)로 널리 알려진 고장임에 다름없다.
혜능이 조계에 돌아간 시기는 법성사(제지사)에서 수계한 직후인 의봉원년(儀鳳元年:676)으로서 그의 나이 39세 무렵이다. 67세로 입적(입적)할 때까지 38년 동안 조계를 근거지로해서 교화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할 수 있다. 22세에 출가한 후 17년 동안 묻혀 살았음을 상기해 보면 혜능의 개당설법시기는 39세가 된다.
오늘날 혜능의 자서전(自敍傳)과 설법집을 종합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육조단경(六祖壇經)은 소주 대범사(大梵寺)에서의 개당설법(開堂說法)의 형식을 취하여 조계 38년의 행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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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能(638~713)
禪宗六祖大師、大鑑禪師。祖籍范陽(河北),俗姓盧,生於南海新興(廣東)。據六祖法寶壇經行由品載,其父早亡,家貧,常採薪汲水以奉寡母。一日負薪至市,聞客讀誦金剛經,心?開悟,時五祖弘忍 住?州黃梅之東禪院,法門甚盛。師乃前往拜謁。五祖試問其所來及欲求何物,師答曰:「弟子是嶺南新州百姓,遠來禮師,惟求作佛,不求餘物。」五祖謂:「汝是嶺南人,又是??,若?堪作佛?」惠能對曰:「人雖有南北,佛性本無南北,??身與和?不同,佛性有何差別?」五祖驚異其稟性非凡,遂使入?房?米,歷八月。一日,五祖令?人各述一偈以傳衣授法,上座神秀遂於壁廊書偈曰:「身是菩提樹,心如明鏡臺,時時勤拂拭,勿使惹塵埃。」師聞之,謂此偈未見本性,遂請一童子代於壁間亦書一偈曰:「菩提本無樹,明鏡亦非臺,本來無一物,何處惹塵埃?」五祖聞之,識其??能傳大法者,乃夜召師入室,潛授衣法,?遣其連夜南歸,隱於四會、懷集之間。

過了十餘年,唐高宗儀鳳元年(676)大師至南海廣州法性寺;?印宗法師講《涅槃經》,因有二僧辯風幡,一說風動,一說幡動,爭論不已。惠能便?口說?「不是風動,也不是幡動,是仁者心動!」。印宗法師深器之,故依印宗出家,受具足戒。翌年,移住於韶陽曹溪寶林寺,弘揚「直指人心,見性成佛」之頓悟法門。與神秀於北方所倡之漸悟法門相對,史稱「南頓北漸、南能北秀」。其弟子法海將其?說匯編成書,名「六祖法寶壇經」,盛行於世,?後來禪宗之宗經。後應刺史韋?之請,於大梵寺樹立法幢;未久歸曹溪,弘布大法,道俗歸崇。神龍元年(705),中宗派遣內侍薛簡召師至京師,師稱疾固辭未往,帝乃?賜磨衲袈裟及水晶?等物,??改寶林寺?「中興寺」。三年,更賜「法泉寺」額。

師又曾捨宅?國恩寺,先天元年(712),命門人於寺內建立報恩塔。翌年七月,歸返國恩寺,八月示寂,世壽七十六。師肉身不壞,?今仍存,歸停曹溪。憲宗時諡號「大鑑禪師」。遺錄有六祖壇經一卷、金剛經口訣等。其中六祖壇經初由法海集錄師之語要,後人多所節略,未能見祖意之全貌,元代德異乃探求諸方,得其全文。至元二十八年(1291),宗寶重新校對三種異本,正其訛誤,詳其節略,增補弟子之請益機緣而予印行,今收於大正藏第四十八冊。

惠能本與神秀同?弘忍門下的大弟子,但因對禪的看法不同,後來遂分?南北二宗。北宗禪法多弘傳於北方貴族階層,南宗初行於嶺南一帶。後由惠能弟子神會於開元十八年(730)在洛陽定南北宗是非大會上,極力說明北宗禪?「師承是旁,法門是漸」,影響所及,北宗的勢力遂逐漸衰退。師之嗣法弟子四十餘人中,以荷澤神會、南陽慧忠、永嘉玄覺、?原行思、南嶽懷讓 等最著,開後世臨濟、曹洞等五家七宗之禪。(臨濟、?仰、曹洞、雲門、法眼等五家,加上出自臨濟之楊岐派、黃龍派,合稱七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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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인수
k41i01s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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