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바꿀 것은 다 바꾸자

불교에 대한 바른 견해, 이를 최우선 간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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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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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불교, 바꿀 것은 다 바꾸자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18, (토) 8:42 am

불교, 바꿀 것은 다 바꾸자
글쓴이: 사자후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바꿔 바꿔 사람을 다 바꿔. 바꿔 바꿔 거짓은 다 바꿔. 바꿔 바꿔 세상을 다 바꿔.
테크노가수 이정현이 부른 노래 '바꿔'가 새 천년 새해 벽두부터 한국사회를 크게 흔들어대고 있다. 어른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몸짓인 테크노댄스에 맞춰 부르는 그녀의 노래는 마치 주문과도 같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노랫말은 본래의 뜻이 어디에 있든 이미 짙은 사회성을 띤 것이 됐다.

이정현은 노래를 통해 온갖 허위와 잘난 것들을 통째로 부정하고 '모든 걸 다 바꾸자'고 선동한다. 덩달아 신문과 잡지들은 이정현을 인터뷰하고 왜 '바꿔'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기사를 싣느라고 법석이다. 가위 '바꿔 신드롬'이라 할만한 현상이다.

이 같은 '바꿔 열풍'을 지켜보면서 한가지 반성되는 것은 과연 불교는 바꿀 것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그 동안 불교는 개혁 또는 변화와 같은 움직임에는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다. 종단 내적으로는 제도개혁이다 개혁종단이다 해서 자기변신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이 대세를 장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니컬하게 말하면 불교에서 변화나 개혁은 마지못해 하는 흉내내기 또는 대외선전용에 불과했다.

돌이켜보면 불교만큼 바꾸는 것에 인색한 종교도 별로 없는 것 같다. 한용운을 비롯한 근대불교의 선각자들이 그토록 불교유신과 개혁을 주장했지만 한가지도 제대로 유신과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율문제, 포교문제, 제도문제 등 산적한 과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아직도 같은 주제 같은 타령 그대로다. 남들은 랩이다 테크노다 하는데 우리 불교는 새 천년에도 흘러간 옛 노래나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바야흐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로 숨가쁜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정체란 곧 낙후와 퇴보를 의미한다. 세상은 벤처다 뭐다 해서 저렇게 토끼뜀으로 가는데 불교만 느긋하게 팔자걸음을 걷는다면 정법의 영토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미 불교는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아니다. 각종 통계수치가 그렇고, 현실적 상황도 그렇다. 도심의 사찰 수와 교회 수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영향력이나 종교적 역할에서도 불교는 기독교에 뒤진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불교도 바뀌어야 한다. 오래 전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이 일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불교가 바꾸어야 할 것은 우선 터무니없는 관념적 우월주의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라고 말한다. 하지만 위대한 종교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신 있게 증거를 대지 못한다.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불교가 한 일이 무엇인가'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불교가 한 역할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불교 자체가 정화되지 못하고 사회의 지도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 어떻게 남보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겠는가.

불교는 원래 바꾸는 종교였다. 부처님 자신이 어리석음을 돌려 깨달음을 열었고(轉米開悟)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만드는(革凡成聖) 일에 매진한 종교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렇다면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바꾸어야 한다. 낡은 의식과 관념을 확 바꾸어야 한다. 중생사회를 바꾸어 정토를 이루고자 한다면 불교 자체부터 바뀌어야 한다. 갈등을 화해로 바꾸고, 소모적 종단 운영방식도 생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교육과 포교, 제도도 생산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바꾸어야만 한국불교가 살아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정법만이 포교다. 포교란 무엇인가. 왜 포교를 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고 분명하다.
진리(法)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교화해 반야(般若)의 눈을 뜨게 하고 바르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불교라는 교단이 존재하는 이유도 부처님이 가르친 정법의 수호와 전지, 그리고 확대를 위해서다. 승려가 있고 절이 있고 포교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포교란 바꿔 말하면 정법의 선양이고 확산이며 실현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불교신도를 자처한다고 하더라도 정법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포교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설법을 한다면서 외도의 가르침을 불법인 양 태연히 가장해서 말한다든가 불공을 한다면서 이교도처럼 개인적 구복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라 할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불교를 가장한 사교(邪敎)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불교 포교현실은 어떠한가.
법당에서는 정법이 가르쳐지고 있는가. 불자들은 그 가르침을 사무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그렇지 못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온갖 사언마설(邪言魔說)이 불교를 가장해서 흑사병처럼 창궐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좀 심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간판만 바꿔 걸면 서양의 어떤 종교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그런 내용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법사의 입에서 무차별로 '설법'되고 있다. 그 명백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절에서 입춘부적을 파는 일은 상상도 못했다. 아무리 신도들이 그런 것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계율로 금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스님들의 생각이었다. 만약 어느 절에서 입춘부적을 나누어주었다면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다. 이른바 포교를 잘한다는 절에서조차 '방편'이란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한다. 심지어는 스님들이 신도들의 궁합과 작명, 택일에서부터 사업운세, 관상, 사주까지 보아주는 예도 흔하다.

만사형통의 기도는 이제 불자들의 신행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돼버렸다. 대학입시철이 되면 절마다 합격을 비는 백일기도가 벌어진다. 현수막까지 내 걸린 이 기도는 도시주변의 웬만한 절 치고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제는 절 집안의 중요한 풍속으로 자리한 치병(治病) 득남(得男) 승진(昇進)기도도 연중무휴로 진행된다.
이런 절에서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정각자, 인류를 바른 길로 이끄는 큰 스승(大導師)이 아니라 인간의 길흉화복을 한손에 거머쥔 전지전능한 절대신으로 둔갑한다. 그러다 보니 절마다 가장 중요한 법사(法事)는 불공이요 기도다.

불공이나 기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부처님의 정법에 귀의하고 공양하는 의미의 불공, 번뇌를 조복받기 위한 진언수행으로서의 기도라면 마땅히 권장돼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기도=영험'의 등식이 서양종교에서 가르치는 '기도=구원'의 등식과 같은 구조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법(邪法)이다. 이런 사법에 빠져 있으면서 기도만 하면 만복을 소낙비처럼 받는다고 불교를 가르치는 것은 포교(布敎)가 아니라 파교(破敎)다.
정법을 펴는데 매진해도 부족한 형편에 이런 일을 해놓고도 사람만 많이 모이면 포교를 잘한다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처녀의 임신같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어처구니없는 변명이란 이런 것이다.
“근기 낮은 중생을 인도하려면 방편이 필요하다. 종교에 신비한 측면이 없다면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변명 뒤에 숨어있는 보다 솔직한 이유는 좀 다르다. 하나는 그런 기도나 불공이 사찰의 수입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불교를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일찍이 이런 점을 염려해 입멸(入滅)에 즈음해 '진리에 의지하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法歸依 法燈明)\'라고 유훈을 남긴바 있다. 그런데도 정법의 사도(如來使)이어야 할 사람이 사법(邪法)의 찬미자가 되고 외도의 가르침을 방편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자가 의지해야 할 것은 오직 진리뿐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은 그것을 다음 네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진리에 의지할 것이며 사람에 의지하지 말 것(依法不依人)
가르침의 뜻에 따를 것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말이나 문자에 의지하지 말 것(依義不依語)
참지혜에 의지할 것이며 세속적인 지식에 의지하지 말 것(依智不依識)
완전한 가르침에 의지할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에 의지하지 말 것(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이것은 불교의 생명이 바로 정법에 의지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정법을 바르게 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간교해서 옳은 말씀, 진리의 가르침은 배우고 실천하기를 외면한다. 하지만 포교란 오히려 그런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미혹한 중생이 없다면 부처님이 굳이 45년 동안 장광설을 했을 이유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사람을 얼마나 많이 모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몇 명에게 '정법'을 전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포교는 아무리 양적인 확대가 이루어졌더라도 질적으로는 실패한 것이다. 우리 불교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법당의 단청에 빛이 바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의 당간(幢竿)이 높이 서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점을 깊이 인식할 때만이 한국불교는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갈 것이다.

서양불교에서 배우자
아야 케마는 남방불교를 공부한 최초의 서양비구니다. 스님은 5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출가한 뒤 스리랑카, 호주 등에서 수행을 했다. 만년에는 독일로 돌아가 뮌헨 근교에 '부처님의 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명상과 설법하다가 1997년 입적했다.
최근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자서전 “이 생명 다 바쳐서”는 왜 그녀가 세속적 행복을 포기하고 출가하게 됐는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79년 나는 드디어 비구니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 나는 여러 가지 일을 겪었으나 결코 세속적인 것에서는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긴 여행을 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흥미진진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마음의 평화와 고요는 얻을 수 없었다. 마음의 평화와 고요는 오직 '내 마음' 속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로써 나는 최고의 이상을 향해 내 모든 것을 헌신할 준비를 했다.]

케마 스님의 이 같은 고백은 서양인에게 불교가 어떻게 이해되고 실천되어지고 있는가를 엿보게 한다. 서양에서 불교도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 그 빛을 이웃에게 회향하기 위해서다. 저들에게 있어 부처님은 절대자가 아니라 인류의 스승이다.
서양사람들이 이해하는 불교는 합리적이고 지적인 종교다.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며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불교를 주목한다.
유일신의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서양종교에 의문을 가지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불교의 메시지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서양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교양 있고 지성적인 사람들이다. 이제 막 생겨나기 시작한 서양의 출가자들도 물질적 관심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평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아직은 저들에게서 종교를 빵으로 바꾸었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에 비해 불교의 본향으로 자부하는 동양의 불교도들은 개인의 물질적 이익과 구복을 위해 불교를 믿는다. 동양의 불자들에게 부처님은 현세이익을 보장해주는 신적인 존재다. 불교본래의 합리적이고 지적인 전통은 방편이라는 미명 아래 왜곡되고 만다.
출가자들도 진정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물질적 탐착에 빠지는 예가 많다. 종교를 팔아 빵을 사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재가불자들에게 부처님은 절대자이며 기도를 하면 가피를 주는 존재라고 가르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양의 불교도들은 서양종교를 모방하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도나 의례의 문제는 물론이고 교리나 종교생활마저 저들을 닮아야 비로소 '종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이것이 현재 동양과 서양의 불교상황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불교에 관한 한 서양에 대해 우월하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이러한 생각은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서양사람들의 불교이해가 더 정확하다. 실천수행 또한 우리보다 더 진지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이제는 동양의 지식인들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 서양사람이 쓴 책을 읽어야 할 정도다. 불교이론도 역수입한 것이라야 먹혀들어 간다. 심지어는 일반법회도 외국스님이 주관하는 곳이 더 성황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뻔하다. 오래 동안 불교가 융성했던 동양에서는 본래의 순수한 정신적 전통이 많이 퇴색되고 말았다. 반면 이제 발아를 시작한 서양불교는 도리어 싱싱하고 순수한 참 불교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부끄럽더라도 서양불교에서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서양불교의 방법이 옳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래야 고목에서 새순이 돋아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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