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82년 말부터 신동기와 함께 미국을 향한 새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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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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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4) 나는 82년 말부터 신동기와 함께 미국을 향한 새 길을 찾는다.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08, (일) 12:52 pm

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가 없었다면, 정재호, 최세경, 최영희와 하은려, 방금봉, 박재원, 김안수, 이건호로 이어진 국제불교도협의회는 어느 길을 갔을까. 그러나 박정희 유신시대의 국제정세에 새줄기를 찾아 동남아불교와 교류의 장을 열어보려던 나의 불교민간외교의 꿈은 펴보지도 못한 채,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함께 신군부의 등장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다시금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신군부의 정치참여는 결국 민주화의 열망에 반하는 악순환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그나마 함께 했던 이들마저 떠난 후가 아니던가. 더구나 80년 불교법난을 겪으며 불교 스스로는 자주성을 상실한 채, 불교미래를 지향하고자 하는 불교국제교류 역시 신군부의 보호가 없다면 그 운신 폭을 넓힐 수 없어, 자주적 회생운동은 매우 힘들겠다는 판단에 이른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 일을 성취해 낼 수 있을까. 80년 10월 중순에 잠시 미국과 일본을 거쳐 왔던 나는 각국불교가 이미 미국으로 이민불교의 터전을 확립해 놓고 있음을 보았다. 국제교류의 불교운동은 어쩌면 새롭게 미국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긴다. 한국에선 정치세력과의 결탁 없이는 도저히 자유롭게 불교활동도 펼칠 수 없다는 시국적 상황분석에서 한국을 포기하게 되는 나의 마음이 서글프기만 했다. 그토록 한반도를 중심한 동방의 빛을 전 세계에 외쳐보려 했건만, 그도 나의 능력 밖의 일로 한계에 있었으니 어찌하랴. 한국불교가 중심축이 되어 전 세계로 향한 교류의 꿈은 이제는 접어야 할 것 같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리고 한미관계를 통한 미주불교운동으로 새바람을 일으키며 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또 다른 망상의 꿈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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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 참가한 각국의 불교지도자들이 청와대를 방문,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제공=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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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22일 - LA한국문화원 강당에서 부처님오신날 기념 학술세미나; 이능가대선사, 박성배교수, 김하태박사의 ‘종교의 사회 참여’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함. 이때 고암대종사, 무진장스님, 이종익박사, 김구산교수 등 LA관음사에 방문하시어 머물고 계신 때임.

70년대 한국에서 세계불교행사를 주도했던 능가스님도 78년부터는 미국에 드나들고 계시질 않던가. WFB 세계불교도대회 9차, 10차 유치에 실패한 한국은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 대회를 개최한다. 그래서 1970년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는 세계불교지도자 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한국불교 주도의 첫 세계불교대회였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동포’라는 기치를 내건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는 중국, 남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네팔, 파키스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티베트, 홍콩, 일본 등 동아시아 25개국 250여명이 참석했다. 대만의 백성, 베트남의 차우스님 등 국제적인 인물이 대거 참석했다.

이 대회를 주도한 인물은 청담스님과 능가스님이었다. 대회 본부장을 맡았던 능가스님은 1967년부터 청담스님 등과 논의해 세계불교연합 상설기구를 한국에 유치하기로 하고, 세계 불교계와 접촉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결실로 70년에 한국이 주도하는 첫 세계불교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대회에 이어 1971년 10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세계고승합동대법회가 열렸다. 10개국 22명의 고승들이 참가한 법회는 능가스님이 주도해 범어사에서 열렸다. 1973년은 8월 26일 제2차 세계불교청년지도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12개국 62명이 참석해 사찰과 공업단지 새마을 시범단지 등을 둘러보았으며 육영수 여사는 이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이어 9월 4일 룸비니개발에 한국불교가 적극 참여하기 위해 한국위원회가 창설됐다. 위원장에는 불교신자로 당시 국회문공위상임위원장인 육인수씨가 선임됐으며 전국신도회 김제원회장, 조중훈 한진그룹회장, 함병선 예비역장군이 부회장을 맡았다.

80년 법난을 겪으며, 그 당시 군부세력의 판세를 보건데 사전에 짐작은 했지만, 그토록 대책도 원칙도 없는 사회악 일소로 몰아치는 정치적 작태는 5.18민주항쟁을 짓밟은 그들이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감히 하리라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불교가 늘 호국안보의 수단으로만 점철되어 있던 것이, 그토록 불교본연의 사회운동에 개화정신을 피어내지 못하는 승려들이나 재가 불교인들을 보면서 항상 나는 불만으로 사회적 불교역할에 조금이나마 약동할 수 있게끔 안간힘을 쏟아왔다고 자부했건만, 그러나 별반 큰 호응을 못 받아 온 것은 내부의 그릇들이 아직은 사회를 향도할 만한 인재들로 자라나지 못했고, 그간 줄곧 타성에 젖어온 종단관리를 보면서 얼마나 불교계를 얕잡아봤으면 그랬으랴, 올 것이 왔구나했었다. 하지만 반면 이제부터는 정부의 보호막을 벗어난 불교인 스스로 자율의지로 나아가려는 의식전환이 새로이 싹틀 수만 있다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나마 새 희망을 점쳐본 나였다. 하지만 이런 새 기운은 많은 시간이 걸려서야 태동되지 않을까 했기에 이는 나에겐 미래 기대일 뿐이었다.

이제 나의 마지막 한국에서의 넋두리가 미국행을 결정한다.

허탈한 나의 마음을 그리고 혼란했던 나의 마음을 친구 신동기가 82년 겨울부터 한국에 계속 체류하면서 나를 찾아와 만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의론하면서 미국으로 가자고 나를 재촉한다. 친구 신동기는 10년째 접어든 미시민권자로 어쩌다 재혼한 입장이었다. 그때의 만남은 주로 광화문 미대사관 근처 또는 종로구청 청진동 다방이었다.

당시 중학교 동창모임에 나갔더니 모처럼 한 친구가 하던 말, 너처럼 일관된 민족주의자가 왜 민정당 활동에 몸담지 않느냐고 하며 회유한다. 하지만 나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처지로 정통성을 지닌 정당도 아닌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싶어 싫다고 했다. 조국을 위해 도덕과 애국심을 잃지 않도록 국민교육 함양으로 성장한 우리들이 아니던가. 어쨌든 국내활동에서 불교로만 일관했던 내가 더구나 조국을 떠나 미국 가서 무얼 하겠다는 거냐고 국내에서 무슨 일이든 찾아보자던 그간 나의 불교활동을 도와왔던 조정휘, 박제경 등 절친한 친구들의 말, 모든 걸 제치고 미국으로 향하려던 나의 마음은 실은 착잡하기만 했었다. 게다가 도안스님도 내가 미국으로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던 때에, 나의 아내마저 미국 가는 걸 환영하지 않았기에 그때까진 확실하게 미국으로 발길을 잡을 수가 없었던 입장이었다. 만약 그때에 한국에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면, 어쩌면 불교활동은 접고 아마도 매제와 함께 건축 토건사업에 종사하게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던 식의 미국행을 결정했던 나, 결국 그 친구가 바로 신동기가 아니던가. 처음에 도안스님에게도 미국행을 주선하더니, 이제는 나까지 이 친구의 주선으로 미국을 향하게 된 것이 아니던가.

이 꼴이 무어란 말이냐, 뚜렷하게 보장된 일도 없는데, 그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무턱대고 그저 옮겨 보자던 나, 참으로 한심했다. 그러나 나에겐 다른 일을 찾아도 산 넘어 산이다. 달리 기반도 없이 다른 이들과 새로운 길을 밟아볼 심산이라면 그럴 바에야 미국이 낫지 않겠는가하는 친구 신동기의 채근이다. 미국은 성장하는 아이들 학비부담도 없고, 영주권문호에도 이미 나에겐 확보된 신분이니, 이처럼 그간 불교에 몸담아 온 나의 이력을 통해 미국행을 주선하는 신동기의 조언,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친구 신동기는 오클랜드에 살고 있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친구(서광준)도 나를 반길 것이라 한다.

친구 신동기는 오클랜드에서 합기도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체육관을 편히 이용할 수 있다면서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불교신자들을 움직여서 불교집회를 새롭게 개척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중아일보 지국을 통해 중앙일보 샌프란시스코지역 현지보도판을 만드는데, 나의 한국서의 국제불교회보(문공부 등록) 편집인 경력으로 충분히 우선 필요한 편집자 직업을 알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벽면 조각불상 액자하나를 모시고, 법사가운 한 벌만 옷가방 속에 담고 83년 1월 10일 친구 신동기와 함께 배웅하는 사람도 없이 단둘이서 김포공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직항하여 도미한 것이 어느새 33년이란 세월이 된 것이다.

다음 편부터는 나의 미국생활이 어떻게 전개 되는가 곧바로 이어가기로 한다. 그간에 못 다한 불교활동에 대한 나의 정열은 미국에서 어떻게 펼쳐져 왔나 33년을 회고하면서, 내가 본 교민사회 그리고 LA, 미주한국불교와 이웃 미국불교의 이모저모를 동시에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4끝)<2015.12.11.>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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