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미국이 이미 국제불교 교류의 장을 펴놓고 있었다. 새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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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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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3) 미국이 이미 국제불교 교류의 장을 펴놓고 있었다. 새 길을 찾는다.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08, (일) 12:36 pm

1) 나는 80년 10월 중순 첫 미국방문 길에서 미국에 이민해 있는 각국불교 현황을 조금은 살펴 볼 수 있었다. 일본, 티벳, 중국, 베트남, 태국, 실론 등 북-남방 불교권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한국에서 펼쳐보려던 국제불교 운동도 결국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수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 때였다. 그러나 그때 미주한국불교가 그런 일을 주도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여건을 발전시키면 국제불교운동을 향한 새시대의 키워드가 미국에 있음을 짐작하면서 방도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고서 한국으로 귀국했던 나였다.

이제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다시 새 정국이 열리는 한국의 81년을 살펴보자, 그 당시 국제불교도협의회 존속여부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이어 가고자 한다.

제11대 대통령(80.9.1)으로 취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유신헌법체제였기에 대신 새로운 헌법인 제5공화국 헌법을 마련했다. 대통령을 7년 단임제로 바꾸고, 다만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방식에서 선거인단 선출제도를 도입했다. 1981년 1월 15일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제12대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뿐만 아니라, 야당 창당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다. 그리고 1981년 1월 23일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된 김대중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됐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80.5.17 비상계엄은 1981년 1월 24일로 해제하였다.

1981년 2월 11일 전국 1,905개 선거구에서 대통령선거인단을 구성했다. 그리고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출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전두환 후보가 유효투표수의 90.2%인 4,755표를 득표하여 당선되었고, 전두환은 11대에 이어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연장선상의 제5공화국을 이끌어 가게 된 연유다. 이어 1981년부터는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다음해는 통행금지까지 해제되었다.<이상은 오늘에 공개된 인터넷 정보에서 검색하여 간추려 옮겨 논 것임>

1981년 불교계 정황

조계종단은 80년 10월 27일 불교법난을 겪고, 종단수습을 위해 1980년 11월 5일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켜, 정지된 종무행정을 탄성스님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승계했다. 중흥회의는 81년 1월 7일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 종정의 임기를 10년으로 하는 등 종단운영의 새 틀을 짰다. 새 종헌에 의거 1월 11일 원로회의는 제6대 종정에 성철스님을 추대하고, 18대 총무원장에 성수스님을 선출했다. 그리고 1월 19일 제7대 중앙종회가 개원하면서 정화중흥회의는 그 소임을 다하고 해산했다. 성철스님은 81년 1월 20일 조계종 6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총무원장은 성수스님이 81년 1월16일~ 6월10일까지, 그 다음은 초우스님이 81년 6월10일~82년 1월7일까지 종단운영을 하던 체제였다. 이때부터 종단은 총무원장을 종회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뀐 때였다. 또한 이전까지 종정 권한에 있던 종단 대표권이 총무원장에게로 대표권이 이양되어 명확히 바뀌게 된 것은 10·27 법난이후 들어선 정화중흥회의를 통해 원로회의가 가동되면서부터 이루어진 절차였다.

나의 운신 폭은 한계에 닿았다. 벗어날 길을 찾아본다.

81년은 나에게 있어 일대전환을 가져왔다. 이제 혼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펼칠 길이 막막해진 혼자가 아니던가. 그래서 81년 새해 벽두부터 국제불교도협의회를 이끌어 갈 방도는 한계에 있었다. 그간의 주요임원 최세경, 하은려, 방금봉, 그리고 박재원 체제에 이어지며 배후의 힘이 되었던 분들이 모두 떠난 뒤였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꾸려나갈 수 있을까 암울하기만 했다. 그래도 새로운 연대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일단 내부 개편부터 했다. 회장은 당분간 공석으로 두고 직무대행체제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남아 있던 이사들을 규합한 후, 회장공석 중에 수석부회장, 상임부회장 순으로 이미 기틀이 잡혀있던 정관에 의거 사무총장이 상임부회장을 겸임하도록 이사회의 의결을 보았다. 그래서 사무총장인 내가 상임부회장을 겸하면서, 공석 중인 회장이 선임될 때까지 그 직무대행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대외적으로 국제불교회보를 통해 이를 공지하였다. 이사장에는 김성수, 상임이사에는 김길태로 하고, 임원보강을 위해 동지규합에 머리를 맞대고 힘을 기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세경 회장이 KBS사장에서 물러난 뒤, 80년 8월부터 본인의 사의(구술)표명으로 국제불교도협의회는 회장이 공석 중인데, 이후 회장직무대행을 월권행위로 투서하여 문공부 감사과에서 그 진상을 조사하고자 했다. 그간 나의 국제불교도협의회 회장직무대행체제 업무가 합법성인가를 묻는 확인진술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른 전말(진술)보고를 통해 그간의 모든 업무진행이 적법성으로 무탈허출한 입장임을 아울러 판명했던 때다.

그 뒤 회장 천거에 문호를 열고 있던 중이어서, 일일이 누구라고는 밝힐 수 없지만, 어쨌든 신군부에 배경을 둔 이와 연을 이으려는 분도 있었고, 정계에 몸담아 왔던 분 중 참신한 불자, 또는 재계에 몸담고 있는 유력한 불자를 찾자는 둥 여러 각도의 분석으로, 뚜렷한 대책은 잡히지 않고 오히려 골머리만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시국이 뒤숭숭하니 덩달아 인맥을 찾는데도 난감했던 때다.

이때에 소문은 돌고, 나를 위해 위로를 겸해 충고하는 분이 계셨다. 물론 이분에 대해 누구라고 밝히기엔 그 당시 별정공무원 신분인지라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을 듯싶다. 회장선임에 신중을 기하라는 것, 그리고 국제불교도협의회 임직에서 완전히 떠나있질 말라 하신다. 무슨 뜻이었을까. 그것은 내가 떠나면 곧바로 국제불교도협의회는 등록취소를 당한다는 것. 나의 의지와 생각을 바르게 보고 존중해서 믿고, 지금까지 국제불교도협의회가 보호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안스님께 건네준, 연합건축(김만성)에 의해 그려낸 LA불교문화원-설계구도의 산중사찰 상상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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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럭저럭 시간은 흐르고, 도안스님이 LA불교문화원 건립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을 위해 1981년 3월 31일 일시귀국해서 나를 만나고 있던 때다. 1981년 4월 10일 칠보사에서 LA불교문화회관건립 자문위원회 결성을 위해 분주히 각계 인사들을 접촉하셨다. 그때에 스님은 작년부터 연합건축(김만성)을 통해 미리 부탁해 놓은 LA불교문화원-설계구도의 산중사찰 상상 조감도를, 그때에 찾아오라 하시어 완성된 것을 도안스님께 건네주게 된 때였다. 도안스님은 조감도를 갖고서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원로들로 구성한 칠보사 연석회담에 오신 조명기, 이종익, 윤임술, 박완일, 홍윤식, 황경석, 강영숙 외 외부원로와 종단대표가 합석한 자리에서 건립계획안을 설명하셨다고 했다. 그리고서 도안스님은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셨던 때다.

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11대에 이어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연장선상의 제5공화국을 이끌던 때로, 03.14「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공포와 04.07「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시행령」공포로-평통사무처 창설이 된 후 그 일로 나의 외사촌(강영복)형님이 총무처에서 평통자문회의 사무처 운영국장으로 옮겨 있었던 것을 알고, 그때 나는 해외평통위원에 도안스님을 반드시 배정, 빠뜨리지 말고 위촉해 놓을 것을 요청했었다. 그래서 실은 그때로부터 도안스님은 해외(LA)평통위원에 있게 된 연유가 된다.

그리고 4월 중순경 느닷없이 총무원 사회부 장무익 과장님이 나를 찾아 오셨다. 작년 제9회 불교미술전람회(80년 10월 22일부터 11월 4일까지 총무원불교회관)에서 최고상(종정상)을 수상한 11면 관세음보살상 작가들의 딱한 사정을 알린 것이다. 이 작품을 모셔갈 곳이 없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작가 2인(공동작품)에게 100만원 상금밖에 못주고 있는데, 제작비가 200만원이 들어갔다 했다. 각 종단사찰 어느 곳이든 1,000만원에 가져갈 곳만 있으면 찾아 알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난감한 입장이 됐다. 큰 사찰이 나서서 불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면, 내가 어디에서 그런 곳을 찾을 수 있겠으며, 그 당시 1,000만원을 어느 사찰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싶다. 어쨌든 작가를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그래서 작가 김홍복씨가 찾아왔기에 거두절미하고 내가 추천하는 곳에 기증할 수 있겠느냐 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며 한참동안 물끄러미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디인데요. 미국이다. LA한국불교문화회관에 기증하는 것이다. 어차피 그곳에 갈려면 이운식을 해야 한다. 스님이 나오셔서 조계사법당에서 이운식을 하고 모셔가도록 조치하겠다. 내 방법은 이것뿐이니,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세요. 이같이 상담하고 헤어졌는데 그 뒤 답변이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을 했고, 곧바로 내게 와서 기증서류를 작성해 놓고 돌아간 듯하다. 그래서 미국에다 도안스님께 전화로 알리고, 일정을 잡아 이운식을 하고 모셔가라고 했다.

이러고 있던 중에 이번에는 전국신도회 사무총장을 75년부터 6년간 줄곧 맡아왔던 이건호법사가 신도회 일은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서 나를 찾는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불교법인체가 필요하단다. 그는 지금 장영자(보각행)보살을 돕고 있는데, 대만에 있는 지남궁 같이 큰 불사를 계획하고 있다 했다. 그래서 새로 법인허가를 내기 위한 절차보다 기존에 있는 불교법인을 찾는 중이라고 하면서, 국제불교도협의회를 거론해 온 것이다. 보각행 보살은 하은려 이사장을 통해 알고 있었고, 박재원 부회장과 내가 함께 혜정스님 소개로 만남의 자리(식당)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바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녀를 특별하게 영입할 생각을 두지 안했기 때문에, 별로 마음을 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이야기가 다르다. 어차피 나는 국제불교도협의회 공석중인 회장 영입이 필요했고, 이제는 더 이상 나의 힘에 벅찬 국제불교도협의회 일은 다른 분들에게 승계시키고자 내심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때였다. 오히려 잘됐다싶어 조건을 제시했다. 다 좋은데 이사장은 장보각행 보살이 맡고, 회장은 그래도 남자로 불교계에 내놓아도 덕망에 손색이 없는 참신한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정계불자로 최영희장군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장보각행보살도 인맥이 닿을 겁니다. 그렇게 하겠다면 절차를 밟아 승계하겠다고 확약했다. 장보각행을 대표로 영입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나는 계속 한직의 임원으로 있겠다고 못 박고 헤어졌다. 그리고 난 뒤 연락이 오기를 나의 뜻을 받아드리겠다고 해서, 그럼 절차상 먼저 후원금을 내서 그간 밀린 사무국 운영비(근무자 봉급, 기타)를 정리할 수 있게 돕고, 그 뒤 날을 잡아 이사회 소집을 통해 이사장 선출을 먼저 해놓고, 최영희 회장 선임건은 이사장이 맡아 곧바로 이행하여 대표자 교체신고를 할 수 있도록 일정을 잡아오라고 했다. 이때가 5월 중순쯤으로 짐작된다.

그러고 있을 때 도안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이다. 양재동쪽인 듯 그곳으로 와 달라 하신다. 가보니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출범(1기 81.6.5~83.5.31)으로 이때 해외(LA)지역 평통위원에 위촉되어 제1기 출범회의 개최(81.6.5)에 참석차 오신 것이었다. 공식회의에 들어가기전 잠시 나를 만나 소식을 알린 것이다. 회의참관에 필요한 항공여비를 평통에서 해주어 다시 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겸사해서 11면보살 이운식을 위해 오신 것이다. 칠보사에서 LA불교문화회관건립 자문위원회 결성 일을 보고 조감도를 가지고 미국으로 되돌아가신지 달포 만에 또다시 2차에 걸친 고국방문을 하신 것이다. 그때 평통출범이 없었다면, 도안스님은 11면보살 모셔가는 일만도 힘에 벅찼을 것이다. 그때 평통회의로 항공권일체를 정부에서 부담했었기 때문에 겸사해서 불상만 미국으로 모시고 갈 수 있는 이운식 행사만 치루면 추가여행경비 안들이고 관련된 일들을 끝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 안했다면 이미 3월말 나왔던 스님이 무슨 경비로 2차 방문에 7월 19일 11면보살 이운식까지 할 수 있었겠나싶다. 지금 와서 보니 그때 스님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으면서도 어차피 해야 할 일로 11면불상 모셔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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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겸사해서 도안스님은 1981년 6월 1일 제2차로, LA불교문화회관건립기금 모연(표지에 조감도를 넣은 권선 소책자)운동 한국 전개를 위해 또다시 일시귀국 할 수 있었고, 나는 이때 11면 관음보살상(사진 위)작가로부터 받아둔 기증서류를 바로 전달하고, 이운식에 나오도록 김홍복을 안내한 때였다. 그래서 1기 평통회의 공식일정을 보시고, 도안스님은 11면관음보살상 이운식 일정을 잡는 등 1981년 7월 5일부터 LA불교문화회관건립기금 모연문 100권을 조계종단 전국 각 교구 및 평신도단체장을 예방하고 배부하며 다니셨고, 마침내 1981년 7월 19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과 전국신도회 후원으로 나성불교문화회관에 봉안할 11면관세음보살상 이운법회를 신도 및 귀빈 2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계사법당에서 성대하게 마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서 부산으로 불상을 모시고 가서 배편에 미국 롱비치항으로 운송절차를 끝낸 후, 스님은 다시 곧바로 미국으로 들어가셨던 것이다. 이때 스님은 그동안 모금사업에 필요한 국내 저명한 작가 동양화 등 서예작품을 갖고서 미국에서 모금전시회를 열고자 대작50여점의 작품을 기증받아 모은 것을 표구액자 작업이 미국에서는 표구가 어려우니 이곳 표구점에다 일괄하여 맡겨놓고서, 완성되면 나에게는 항공편으로 탁송을 의뢰하고서 미국으로 들어가신 때다.

그래서 도안스님 체류기간 돕던 일은 모두 끝났고 나는 시간 여유가 생긴 듯 했다. 그 뒤에 이르러, 나는 대한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대구지부 행사에서 국제불교도협의회 상임부회장 자격으로 참석하여 축사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사진 아래)

<연단에 축사하고 있는 필자, 오른쪽 줄에 운문스님, 석주스님, 월산스님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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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있던 중에 이미 7월 초, 이건호 법사로부터 국제불교도협의회 이사장 선출건 이행절차를 밟자고 연락이 온 때였다. 7월 중순쯤 롯떼호텔 회의실을 빌려 이사회를 열자고 제안해 온 것이다. 그래서 일정에 맞춰 이사회를 소집했고, 그 이전에 예정한 후원금을 두 차례 나누어 받게 되어 우선 사무실 인건비 등 채무정리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공부 종무과에도 채무 없는 재무회계 결산보고를 통해 업무인계인수과정에 따른 사전 뒷정리 사무관리를 마무리하면서, 이사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무 인계절차는 상임부회장직만 한직으로 남아있기로 한 나에게서 이건호가 국제불교도협의회 상임이사로 사무국 실무총책을 부여받아 후속 사무행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인수해 가도록 약속해 놓고, 정관 규정절차에 따른 이사회의 의결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그래서 롯떼호텔 회의실로 소집된 이사회는 20여명이 모인 이사회로 의사진행은 나에 의해 하나하나 전체동의를 묻는 절차로 진행했다. 장영자, 이철희씨가 나란히 상석에 앉아서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사회석에서 의제 안건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먼저 공석중인 회장을 선임하기 전에 장영자(보각행)를 이사장으로 선출, 영입하고자 함에 이의가 없는지를 묻고, 아무도 이의가 없다면 만장일치로 오늘 이사회는 이제부터 장영자(보각행)보살을 이사장으로 모심을 선포하겠다고 해서, 전원동의로 박수갈채를 받고 이사장 선임을 완료했다. 두 번째 안건은 공석된 회장에는 최영희 거사님을 천거해서 본인의 취임수락을 받아 국제불교도협의회 새 대표자로 교체신고토록 함에 이의가 없는가 물었다. 이의가 없다면 이사회는 최영희 거사님을 새 회장으로 교체해 모시고, 신임 이사장과 함께 국제불교도협의회를 이끌어 나갈 것에 이의 없음을 만장일치로 의결함을 공식 선언하겠다고 했다. 모두가 큰 박수로 환영을 표명했다. 그래서 신임이사장을 소개하는 이건호 상임이사의 간단한 소개 인사말을 듣고, 그 날의 이사회의를 모두 마치게 되었다.

그 뒤 나는 이건호 상임이사와 실무적 사무인수인계를 8월초에 완료했다. 국제불교도협의회 새 사무실은 이건호 상임이사가 사용하고 있던 보림출판사로 옮기면서 함께 국제불교도협의회 간판을 내건 것으로 알고 있다. 국제불교도협의회 대표임원 교체신고도 그곳에서 필했다고 했다. 그 뒤 나는 홀가분한 입장이 되어 도안스님 일만 전적으로 도울 수 있게 된 것이고, 더불어 다른 일에 함께할만한 곳을 찾아나서는 시간을 갖게 된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나는 도안스님께서 부탁한 서예 30여점, 동양화 대작 20여점의 반절 및 전지크기의 표구제작을 지켜보면서 12월에 가서야 완성될 기미가 보이므로, 광명시에 있던 연립주택을 가지고 서민주택융자를 받게 되어, 여태껏 전세금으로 떠돌이 하던 셋방에서 이사하게 되어 그때서야 내집 마련의 기회가 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겨울은 예비군동원훈련을 받고 온 나의 마지막 일반하사 제대 예비군동원훈련을 치룬 때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초등학교 친구였던 유신이 나를 찾으므로 의론하게 된다. 그 친구는 해외 무역오퍼상 겸 큰 사무실을 충무로 쪽에 두고 있었는데, 사무실에 빈방이 있다고 하면서 그곳을 연락처로 사용하라 한다. 그 친구 도움으로 그곳에 전화당번 여직원(당시 청와대출입-사진기자 최일랑 동생) 하나만 두고, 3개월 정도 연락사무실(주로 도안스님 연결 업무관계)로 이용했다. 나는 여기서 연락사무를 취하면서, 도안스님이 부탁했던 표구완성 작품 50여점을 소형 타이탄 1차에 가득 싣고 공항 세관검열을 일일이 거쳐서 항공운송을 마친 것이 겨우 82년 1월 새해를 맞게 된 때였던 것이다.

2) 81년 국내에서 내가 이러한 처지에 있을 때, LA관음사 81년은 무슨 일을 해왔나 살펴보기로 한다.(관음사 2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81년 한해는 도안스님은 무척이나 바쁘게 활동했던 때다. 두 차례에 걸친 본국을 왕래하면서 LA관음사; 불교문화회관 건립불사 추진의 일에 혼신을 다하던 때였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본국에서 이곳으로 초청한 분들이 관음사를 다녀가던 때라 이들을 영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한해였다.>

1). 1981년 1월11일 성도절 기념 경축음악회를 칠보사 어린이 합창단 특별초청으로 윌셔-이벨극장에서 공연을 가졌음. 1월13일 공연회 수익금 2,100불을 한국학교에 전달.

2). 1981년 1월14일 디즈니랜드 카네이션 특설무대에서 칠보어린이 합창단 특별출연 환영받음. 그리고 LA한국문화원 방문함.

3). 1981년 2월 25일, 불교문화회관 건립위원회를 결성함에 총재로 강석주 스님을 모시었다. (LA관음사 개원7주년을 겸해 발표, 자체 신도임원회의)

4). 1981년 3월 15일, 윌셔(구)앰버서더호텔 만찬모임에서 윤고암, 이능가. 무진장, 이종익, 김구산 등 합석한 가운데 건립위원회 추가 결성(무진장스님을 추진위원장으로 모심)

5). 1981년 3월 31일 문화원 건립위원회 한국지부 결성을 위해 도안스님 본국에 일시귀국

6). 1981년 4월 10일 한국 칠보사에서 LA불교문화회관건립 자문위원회를 결성-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원로들로 구성 - 연석간담회에서 조명기, 이종익, 윤임술, 박완일, 홍윤식, 황경석, 강영숙 외 외부원로와 종단대표가 합석한 자리에서 건립계획안-조감도를 보이며 설명함.

7). 1981년 6월 1일 제2차로, LA불교문화회관건립기금 모연운동 한국 전개를 위해 도안스님 본국에 일시귀국 -(이때 11면 관음보살; 작가로부터 기증서 받음)

8). 1981년 7월 5일부터 LA불교문화회관건립기금 모연문 100권을 조계종단 전국 각 교구 및 평신도단체장을 예방하고 배부함.

9). 1981년 7월 19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과 전국신도회 후원으로 나성불교문화회관에 봉안할 11면관세음보살상 이운법회를 신도 및 귀빈 2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조계사법당에서 성대하게 치룬 기념법회가 있었음. 이 11면관음보살상은 제9회 불교미술전람회(80년10월22일-11월4일 총무원불교회관)에서 최고상(종정상)을 수상한 김홍복, 이명진씨의 역작인바. 작가들의 기증동의를 김안수가 받아내어(81년 4월 중순경/장무익과장 알선) 도안스님께서 이운해 가도록 연락을 취해 이루어진 행사였음.<한편 이 불상은 부산에서 배편으로 LA롱비치항으로 이운되었는데, 그때 롱비치에서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관음사까지 이운한 트레일러가 앞바퀴가 둘 중 하나가 없이 불상은 뒷바퀴 쪽으로 미끄러져 옮겨지어 안전하게 모셔진 채 도착된 것을 목격했던 관음사 용택스님이 확인을 하게 되어 모두들 놀랐던 일, 신비했던 일이 전해지고 있는 11면 관세음보살님이시다.>

10). 1981년 8월 16일 명성여고 합창단 초청공연이 레이크-레이크팍에서 인간문화재 이동안, 이매방, 공옥진, 이종만씨 외 10여명의 기능보유자와 함께 기념공연이 있었음.

11). 1981년 9월 20일 제8회 코리안퍼레이드에서 관음사가 영예의 대상을 받음.

12). 1981년 10월 3일 인도 이인호(화백) 초청 승무공연 - LA하이스쿨에서 거행.

82년은 내가 새 출발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아보던 때다.

충무로에서 무역사업을 하던 친구(유신)가 빈방을 내주어서 나는 여직원 하나만 두고, 잠시 연락사무실로 사용하던 중, 여기서 나는 도안스님이 부탁했던 표구완성 작품 50여점을 항공편으로 운송을 마친 것이 겨우 82년 1월 새해를 맞게 된 때다.

82년 새해는 벽두부터 장영자 사건으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더니, 급기야 검찰에서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결국 민정당 권정달 사무총장의 인책 경질까지 불러들였다. 국제불교도협의회 관련수사가 연계 되는가 해서 이건호 상임이사를 만난 때가 그때인 듯하다. 국제불교도협의회는 예당초 장영자는 이사장직만 맡아있을 뿐, 별도로 이건호 상임이사가 사용하고 있던 보림출판사로 사무실을 갖추면서, 최영희 대표임원으로 문공부에 교체신고도 마친 상태라 했다. 하등 연관될 이유가 없다했다. 이사장 개인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1982년에 들어서면서 장영자는 남편 이철희를 내세워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과시하면서 기업자금지원의 대가로 지원금의 몇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유통하는 수법으로 2천억 원대의 사기 행각을 벌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장씨 부부는 물론 은행장 2명과 내로라하는 기업인 등 모두 32명이 구속됐고 장씨의 형부이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씨도 사건에 휘말려 구속됐다. 장영자는 이철희를 만나 1982년 2월 서울 장충동 사파리 클럽에서 정관계인사들을 대거 초청해 호화 결혼식을 하고는 보란 듯이 이러한 일들을 자행한 것이다.<참으로 서글픈 인생이다. 이 사람들이 불자였단 말인가!>

이 당시 미국에서 도안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국제불교도협의회 업무승계를 장영자(이건호)쪽에 넘긴 사실을 뒤늦게 들었던 스님은 나의 신상에 무슨 일이 없나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장영자 사건과 국제불교도협의회는 별개의 일로 전혀 상관이 없으니, 염려하실 일이 아니라고 일축하고 그때의 근황소식을 아울러 알려드렸던 것 같다.

그 뒤 이건호 법사도 불교출판물 간행에만 국제불교도협의회 발행; 명칭을 사용했을 뿐, 그의 능력으로도 더 이상의 추진력은 없었고, 별 수 없이 국제불교도협의회 본연의 길도 찾지 못해 진전 없이 허무하게 활동도 못하고 끝내 좌절된 단체가 된 듯하다.

82년 3월부터 나는 새로이 법상종 총무원 사회부장직을 맡아 관계하고 있었다. 4월부터 내부 총무원장문제로 법상종 종회가 4월부터 이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법상종 종회의장을 맡고 있던 반포동 관음정사 주지스님과 많은 의견을 나누며 친분을 유지하던 때였고 내가 미국 이민 전까지는 많은 왕래를 그 곳과 했던 때다.(아래 사진은 법상종 신도들과 함께 봄 방생법회 행사 참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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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봄부터 나는 미국으로 들어갈까 해서 도안스님께 의견을 드렸더니, 한국에서도 자리를 못 잡는 처지에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거냐 하시며 반기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 뒤 도안스님에 대해 참으로 서운한 마음이 생겨, 미국에 대한 미련과 도안스님 일손을 돕는 것도 앞으로는 일체 끊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심정을 달래며 있었다. 아마도 스님일은 도와봤자 구차한 일뿐이고, 스님의 주선으로 한국에서 내가 설 땅이 생기지도 않는데 왜 이리도 스님 일에 정열을 쏟아 바쳐야 하는가 하는 타산을 했던 것 같다. 소식을 두절했더니, 어머님께서 내 집으로 달려 오셨다. 그때 어머님은 인천 큰누님이 사시는 아파트에서 살고 계실 때였다. 어머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 남도 돕는데 남도 아닌 동생이 되어가지고 어찌 스님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스님께서 누굴 의지하고 불사를 하겠느냐. 네 공로는 스님이 알고 있으면 되지, 스님 말에 서운하단 생각으로 네 공을 내세워 무엇을 얻겠다는 거냐. 그러지 마라. 네가 어쨌든, 평생 청정을 지키며 불사만 해온 스님공덕만 하겠느냐! 하시며, 스님 일은 무조건 도우라는 엄명이셨다. 스님이 오죽 답답하셨으면 어머님께 하소연 하셨을까 생각을 하니, 내가 어머님께도 죄송스럽고 스님 말씀에 타산을 했다는 생각이 무척 부끄러운 생각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깨닫고, 어머님께는 염려마시라 했고, 연락 오면 힘닿는 데로 도울 테니, 마음 놓고 가시도록 어머님을 배웅한 적이 있었던 그때를 상기해 본다. 그 뒤로는 어머님의 가르침에 의해 나의 스님에 대한 일손 돕기는 전혀 나를 버린 행위로 일관하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82년 6월17일 도안스님은 한국을 다시 방문하셨다. 그리고 LA불교문화회관 건립불사는 한국에 있는 불자들 협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전국 불자들이 십시일반 협력할 수 있도록 이를 집중시켜 모금모연에 동참세력을 확보해 나가야만 가능하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큰 시주자의 원력으로 이루질 일이 많은 이들의 모연의 인연으로 불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취지는 가상하지만, 종단차원에서도 어려운 불사를 도안스님 개인원력으로 이에 대한 모금사업을 전개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이일에 매달리고 계실까. 답답하지만, 도안스님으로선 재력 있는 신도와는 아직 인연을 맺지 못한 터라,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 방법에서 벗어나 도심포교의 새 기류를 펼친 평신도운동이 이제 막 광덕큰스님의 원력으로 불광운동이 피치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그 외는 75년 전후하여 당시의 움직임을 보아서는 도문스님이 이끄시던 용성유훈사업이 피치를 보였을 때, 쌍용의 김미희 여사 정도였다. 그 외는 도선사가 청담스님과 육영수여사 배경으로 참회기도운동의 결실로 신도가 늘어난 것이었고, 또 신흥종단으로 천태종이 구인사에 신도들을 집중시킨 관음신앙운동이 전부다. 어쩌랴, 하는 수 없이 스님의 뜻에 맞춘 방법론 하나를 제시했다. 대예술제전을 열어 신도들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한꺼번에 뜻을 공지하여 대대적으로 알리고 후차적으로 모금운동을 펼쳐야 할 일이라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하와이 대원사 불사를 지켜보면서 외환관리법상 정부의 도움 없이는 모연 물자나 금전이 비합법적으로 미국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하니, 기회에 불자들의 염원을 담는 큰 프로젝트로 이를 실천에 옮기는 수단밖에는 없다 했다. 그래서 불교예술제전을 통해서 스님의 원대한 꿈을 홍보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쯤은 기본적 제시였고, 나중에 구체적인 것은 준비사무실을 마련하고 거기서 구체적인 것을 협의해 나가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일을 곧바로 추진할 만한 연락사무실이 다시 필요하게 됐다. 조계사 근처가 안성맞춤인데 마침, 이상진씨가 자리를 잡은 새 사무실이 낙원동 건대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상진씨의 도움으로 연락사무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손에 따른 사무를 기획단계에서부터 진행과정 전반기록 등 실무를 그곳에서 진행하도록 7월부터 9월까지만 3개월 예정의 임시사무실이었다. 그리고 공연장소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으로 사용허가를 받아내라 했다. 이때 스님의 평통위원 직분은 그 역할을 해냈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사용은 일반에게는 사용을 허락한 일이 없었고, 소극장만 사용되었을 때다. 리셉션(외교사절단교제)코너와 대강당 사용이 절대로 필요했다. 그리고 예술제전 윤곽을 기획했다. 고전과 현대를 교차하는 내용으로 했다. 고전은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 판소리와 협창, 승무, 학춤, 범패와 피리소리 등 다양했다. 현대는 찬불가합창단 600여명으로 잡았다. 그리고 탈렌트 등장으로 분류했다. 남은 건 이제 무대연출 전문가 이종만(녹야학생회 최초창설 멤머)선생과의 의론이었다. 그리고 현장 답방이었다. 이와 같은 전반적인 일, 서울세종문화회관 대강당과 리셉션장소 사용예약, 부산시민회관 사용예약을 마치고 스님께선 구체적인 진행프로그램 출연진 섭외를 내게 몽땅 맡겨놓았다. 가장 중요한 일이 또 있다. 무대 출연진 섭외는 내가 해내겠지만, 관객동원과 사전경비 문제였다. 출연진(고전 또는 탈렌트 등장)은 모두가 무상찬조출연을 전제한 것이고, 다만 기능보유자들의 연습이야 늘상 자신들의 학원에서 할 수 있지만, 불교합창단 합동연습과 한 두곡도 아니고 여러 합창단을 모아 이끌 지휘자 서창업 선생 노고를 예상하면서, 접대식비가 필요했다. 그러자니 도안스님은 공연예정 1회(3시), 2회(7시) 입장권 발매를 그때부터 시작해서, 관객동원준비(1, 2차 7,000석)를 각 사찰들을 돌면서 사전에 해내야만 했다. 가까운 사찰측에 협찬을 미리 받는 등 입장권을 발매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획전반에 따른 팜프렛(프로그램)제작은 반영규 선생에게 맡기고, 나는 준비과정 전반을 점검하며 차질이 없도록 총책을 짊어진 상태다. 그리고 스님은 미국으로 들어가시고 다시 올 때까지 진행과정을 잘 마무리하라 당부하신다. 결국 일은 기획시작부터 행사까지 총 4개월 15일(135일)간에 걸쳐 추진된 일정으로 전체 사전준비와 진행마무리를 해야 하는 매우 시간이 촉박한 스케줄을 가지고 진행된 일이었다. 스님은 6월 17일부터 약 2개월에 걸친 사전준비와 그리고 다시 9월 20일 나오셔셔 행사를 마치기까지 한달열흘이 걸린 총 100일간을 체류하시며 행한 행사였던 것이다. 내가 집중한 일은 8월 이전은 기획과 예약, 사전준비단계에 관련된 것이었고, 8월 이후부터는 출연진 섭외 등 본격적으로 프로그램 편성, 진행과정 완료에 걸린 기간은 총 3개월이 집중된 추진의 일이었다. 그 중 8월과 9월 2개월은 출연섭외를 겸한 합창단원 연습과 프로그램 완성, 팜프렛 제작에 집중된 것이었고, 나머지는 당일행사로 이어진 일과 결과(결산)보고의 일이였다.

당일 연출에 따른 출연진 1회 공연이 2시간이 넘는다. 2회 시작 전 중간 휴식이 30분도 될까말까했다. 개막전 2시부터 종료 10시까지 진행에 있어선 긴장의 긴장이었던 행사였다. 리셉션에는 당시 한국에 와 있는 외교관 가족초정을 통해 한국불교예술성을 보여준 것이며, 불교인의 위상을 알리는 민간외교의 기능을 갖게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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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석굴암 불상 영상을 배경으로 출연한 합창단원들 앞에서 성악가 김화용씨가 최초로 현대찬불가곡 “홀로 피는 연꽃”을 독창하던 개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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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피날레를 장식하던 칠보어린이합창단과 조계사, 불광바라밀다, 명성여고 등 서창업 지휘의 연합합창단원 총 600여명이 출연하여 [동방의 빛]을 마무리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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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방씨 등 전통고전 무용팀과 세납(피리) 출연진과 함께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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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리셉션에서 한송자, 전원주, 선우용녀가 함께 했던 모습>

이날 프로그램은 김안수 진행 이종만 연출로 고전(가야금 병창 및 서도, 남도, 경기 소리 창과 무용 / 100여명)과 현대(서창업 지휘; 찬불-합창, 율동, 독창 / 600여명)를 아우르며, 막간의 불교연예인들(박병호, 김세윤, 장미희 등 10여명)을 총 출연시킨 서울세종문화회관 개관 최초로 대강당 일반인 사용을 불교계가 처음 열도록 한 불교대예술제전 이었다.

그리고 결산회의를 칠보사에서 가졌다. 사전 예산도 마련됨 없이 기획단계에서부터 끝까지 빚도 지지 않고 그리고 이 같은 큰 행사를 열어 모금대책 홍보 효과를 거둔 불교계 최초의 탁월한 현대고전예술제전을 해냈다고 자축했고, 문공부 측에서도 칭송을 했고 또한 불교계에 자긍심을 갖게 한 큰 행사였다고 높이 평가했었다.

2) 82년 국내에서 내가 이러한 처지에 있을 때, LA관음사 82년은 무슨 일을 해왔나 살펴보기로 한다.(관음사 2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82년의 도안스님은 LA관음사와 본국(한국)과의 연대활동을 적극적으로 펴면서 미국 이민사회에 한국불교의 전통문화를 옮겨놓을 터전으로 한국불교문화회관 건립불사 원력을 널리 홍보하면서, 여러 각도의 본국의 후원대책을 강구하던 한 해였다.>

1982년 1월 8일 불교문화원 건립기금조성용 서화 45점이 한국으로부터 관음사로 수송되어 왔음.

1982년 1월 10일 칠보어린이합창단의 초청공연이 윌셔이벨극장에서 성도절 기념으로 성대하게 게최되었음.

1982년 2월 28일 연석임원 합동회의에서 관음사 정관 4조를 수정, 운영체제를 이사장과 회장을 별도로 두어 법인대표(회장)는 당연직으로 주지가 하도록 결의함.

1982년 3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3개월간 청장년을 위한 불교교리강좌 시간을 마련, 청장년 26명이 수료를 하였으며, 이 강좌는 조계종 포교원장 무진장스님과 LA동방대학 김구산교수가 담당하였음.

1982년 6월 17일 불교문화회관 건립기금 모금운동차 주지(도안)스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였음.

1982년 9월 19일 제9회 코리언퍼레이드에서 관음사가 영예의 대상을 획득함. 이날 청년회원 15명이 가장행렬에 참가하여 교포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음.

1982년 9월 20일 불교문화회관건립 기금모금을 위한 불교예술제전 준비관계로 2차에 한국을 주지(도안)스님께서 방문하심.

1982년 9월 27일부터 10일간 인도 이인호선생 초청 동양화 전시회를 개최하여 성황리에 끝냄.

1982년 10월 14일과 24일, 불교문화회관 건립기금 마련을 위한 대예술제[동방의 빛]를 서울세종문화회관 대강당과 부산시민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하여 대성황리에 기금조성운동 취지를 대외(한국내)에 널리 홍보하였음.

1982년 12월 4일 최초의 관음사분원을 라스베가스에 설치하고 개원법회를 겸한 봉불식을 30여명의 신도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원축하행사를 거행하였음.

<82년 도안스님은 신도들에 대한 결속을 다지며 불교문화회관건립 불사를 향한 원력에 총집중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리고 미국의 종교법인 성격을 토대로 1982년 2월 28일 연석임원 합동회의에서 관음사는 법인정관 4조를 수정, 운영체제를 이사장과 회장을 별도로 두기로 하고, 법인대표(회장)는 당연직으로 주지가 하도록 하여, 법인에 의한 사찰운영을 주지가 총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주지는 종단의 임명에 의거 부임할 수 있도록, 한국불교 조계종단 체제의 법적 근거를 관음사 법인정관 규정에다 못 박아 이를 확실하게 해둔 해였다. 도안스님은 불교문화회관건립 불사의 성취를 위해선 더욱이 한국과 연계한 미국에서의 조계종 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해이기도 했다. #지금의 LA관음사 정관은 그때로부터 적용하고 있는 정관임을 아울러 밝힌다.>

다음부터는 내가 한국에서 마지막 미국으로 떠나게 된 그때의 처지와 그 이후를 담는 이야기로 미국생활을 엮어나가기로 한다.

(3끝)<2015.12.1.>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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