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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올린 게시글: 2017-01-07, (토) 9:22 am 

가입일: 2016-11-29, (화) 5:42 am
전체글: 427
1) 79년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 있었을까. 도안스님은 77년 가을, 첫 고국 방문을 통해 국제불교도협의회가 7월부터 문공부에 등록 인가된 사실을 알고 들어가셨고, 용택스님이 78년 가을까지 나의 근황(방금봉 부회장댁-최세경회장 취임축하파티 참석)을 잘 파악하고 들어가 있던 때였다. 하지만 이후 워낙 변화가 심한 때를 겪었기에, 이를 회고하면서 당시를 가름해 보고자 한다.

국제불교도협의회에 78년 5월 취임했던 최세경(마지막 국회의원 시절)회장은 78년 마지막 후반을 보내던 때, 당시 경남 사천-삼천포 지역구 출신 공화당 71년부터 8, 9대 의원으로, 계속해서 10대 국회의원으로 나가려면 공화당 공천이 있어야 할 텐데, 그때에 이르러 최세경 의원 해당 지역구에 대한 공천이 갑자기 구태회 의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유신정우회 내정자 명단 발표에서도 누락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10대 국회의원선거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되었다.

위와 같은 상황의 변화에, 지역구도 뺏기고 유신정우회에도 빠졌다면 최세경 회장의 정치생명은 어찌되는 것일까. 그때에 이상훈(보안사-잠시근무, 이후)선배님은 미국으로 78년 12월말 떠나기 전까지는 매일 사무실에 나오셨다. 그리고 최세경 의원의 갈 곳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라서 나를 위해, 최세경 의원의 갈 곳은 어디일까를 매우 유심히 살펴주었다. 처음은 서울신문 아니면 문화방송 등으로 추측했었다. 12월말이 다되어 공화당 길전식 사무총장 측근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최세경 의원이 KBS사장에 내정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확실하냐고 되물었더니,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나는 곧바로 최세경 회장님을 찾아뵙고, 그 반가운 소식을 확인하려고 들렸던 것인데, 본인은 전혀 알지 못했다. “어디서 들었나. 나도 모르는 소리를.” 하시는데,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제가 알아본 소식이니, 기다려 보시죠.”하고 누굴 통해 들은 것은 함구하고 나온 일이 있었다. 그야 윗선에서 결심한 뜻이 내려진 하명인지, 아니면 내정자로 보고한 측에서 알려온 소식인지는 나로서도 확인한 바 없었기에 함구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그 뒤, 좀 지나서 최세경 회장님으로부터 집에서 아침식사나 함께 하자는 전갈을 받고 들렸더니, KBS사장에 임명이 난 듯 했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셨다. 그 후로는 나는 국제불교도협의회 결재판을 가끔 KBS사장실에 들리어 대기하다가 받게 된 것이었다.

당시 유신정부는 시국에 대한 청와대 강변일변도식 대처에 오히려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한편 79년 8월부터 장영자(불명:보각행)가 느닷없이 등장하여 용두관음보살상을 가지고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때였다. 당시 신문 기사는, 고뇌중생을 고통으로부터 해탈케 해주는 대비원력의 신통력을 가진 성자로 불리는 33관음 중의 하나인 용두관음보살상이 1천6백년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출현해 불교계의 큰 경사가 되고 있다. 서울 칠보사의 돈독한 불자인 장보각행 여사가 소장해 오다 9월 4일 공개한 국보급의 이 관음보살상은 중국 청나라 때 것으로 일제말엽 일본인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다.또 황수영 동국대 박물관장은 『이 용두관음보살상은 중국에서도 으뜸가는 불상중의 하나로 국보적인 가치와 함께 불자들에게도 큰 원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칠보사에서 점안법회때 많은 불자들이 운집했던 것 같다. 교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이때 국제불교도협의회 하은려 이사장도 참례하고 온 뒤에, 장영자(보각행)를 국제불교도협의회에 영입할 수 있길 원했다. 나는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그래서인지 KBS-TV를 통해 황수영 동대 박물관장이 설명하는 용두관음보살상 방영프로를 주선했다고 내게 알린 때였다. 그 당시 내게 알려진 장보각행보살은 불교계에 큰 시주금을 선뜻 내어 여러 곳의 군법당 불사를 위해 사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였다. 그렇지만 그 뒤에 관세음보살이 화현한 것처럼 소문이 돌고 있던 장보각행보살의 처신은 매우 못마땅하게 보았던 나다.

이 무렵 부마사태로 정국은 심각한 불안상태에 있었다, 부마민중항쟁(釜馬民衆抗爭)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와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유신체제에 대항한 항쟁을 말한다. 10월 16일에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철폐"의 구호와 함께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인 17일부터 시민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18일과 19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민주화 시위가 확산됐다. 당시 유신정권은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66명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으며, 10월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출동시킨 후 민간인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위키 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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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준공식을 끝내고, 그날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해 최세경KBS사장으로부터 보고를 듣던 박정희 대통령>사진을 크릭하면 youtube로 볼 수 있음.

박정희 대통령은 생애 마지막 날인 1979년 10월 26일에도 오전에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KBS 시설인 당진송신소로 가서 거기서도 준공식을 하고 도고호텔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귀경 후 궁정동의 만찬장 식탁에서도 저녁 뉴스시간을 기다리며 시계를 보았다고 전해온다. 바로 이 장소가 박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운명을 달리한 곳이 된다.

그때 나는 박대통령서거소식의 공식보도가 발표된 직후, 곧바로 저녁시간을 틈타 하은려 이사장 집에서 최세경 회장과 회동하고 그 때의 상황을 잠시 청취했다. 차지철 김재규 사이가 매우 위태위태한 사이로, 당일 행사장에 함께 가려고 했던 김재규를 차지철이 가로막은 것을 알고 박대통령이 이 둘을 화해시키려고 했던 곳이 궁정동 안가였을 텐데...라는 말씀뿐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로 비상시국에 들어섰으니, 어찌 되어갈지 걱정이라고만 하시었다. 그래도 18년 동안 집권했던 토대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큰 변동 없이 이를 계승하여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데...크게 변하진 않으리라 생각하네. 이처럼 예측하면서 곧 시국안정을 되찾을 것이라는 염원이었다. 이는 그간 집권당에 몸담고 있던 분들의 태반의 기대였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국장이 11월 3일에 거행된 후부터는 12.12사태에 이어 더욱 기득세력의 정변은 불가피해 갔던 것이다.<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나의 꿈도 시들해진다.>

어쨌든 간에 박대통령 국장이 끝난 일주일 뒤에 하은려 이사장은 77년 늦가을에 했던 이조목기 전시회를 또 한 차례 다시 연다. 이때 박재원거사를 석관동 박초당집에서 초당선생 소개로 만났다며, 국제불교도협의회 부회장단으로 모시도록 천거하면서 박재원거사를 전시장에서 직접 소개했다.

그 뒤 박재원 부회장이 국제불교도협의회 사무실에 들려 국제불교도협의회 현황을 청취했고, 우선 회장단 결속을 위한 간담회 모임을 박재원 부회장이 주선함으로 첫 회동을 갖는 석찬 석에 최세경 회장을 모시고 한기복 종무국장과 한영수 종무과장도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박재원 부회장은 안양에 있는 옛 대한불교회관(지금은 한마음과학원 건물, 구 법당)신축건물이 지어지기 이전부터 그곳을 탄허스님과 함께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박재원 부회장님 안내로 몇 차례 그곳을 방문하게 되어, 그 당시 대행스님 삭발 전의 이생님 때부터 인연을 갖게 된다.

그러던 1979년은 12월 12일 정승화 총장을 납치하는 등의 신군부 세력의 군부장악으로 또다시 80년 봄부터 새로운 정국의 변동을 가지게 된다.

위와 같이 79년 나의 국제불교도협의회의 나아갈 바 업무추진은 정세안정이 없어 옴짝달싹 무슨 일을 펴볼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저 관망에 있을 뿐, 도저히 시국의 불안정으로 무엇 하나 뚜렷하게 불교계와 더불어 할 일이 전혀 잡히질 않던 때였다. 최세경 회장의 개인적 입지는 kbs사장직에 있을 뿐이지, 국제불교도협의회측에 기여할 수 있는 직함으로는 하등 소용되지도 못했다. 오히려 박재원 부회장의 역할이 나를 돕고 있었다.

이러한 때 79년도 조계종은 77년 8월 이후 계속된 내분으로 종단이 완전 두 동강이 난 채 진통을 거듭해 왔던 때다. 문공부 등 전국신도회(이후락회장)가 내분을 수습하겠다고 거중조정에 나섰지만 모두가 실패한 채 내분의 소용돌이는 더욱 깊어만 갔다. 법원으로 양측은 계속되는 제소로 골만 깊어갔다. 1979년에는 분규 중에 조계사 및 개운사에서 각각 별도의 봉축 법요식을 개최해 모두 다 망신을 사기도 했던 해다.

2) 국내에서 내가 이러한 처지에 있을 때, LA관음사 79년은 무슨 일을 해왔나 살펴보기로 한다.(관음사 2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관음사 창사 5주년을 맞는 79년 3월 11일은 경산스님과 LA젠센터(일본선원) 진각노사를 모시고 거행된 기념행사가 있었다. 이때 경산스님께선 78년 10월 1일 방미기념으로 설법하셨던 같은 주제의 특별법문을 하셨고, LA젠센터(일본선원) 주지 진각노사는 “미국에 있어서의 금후 불교에 관한 설명”이 있었다.

도안스님이 관음사 창사 기념행사를 가짐에 있어, 1주년 75년은 미국에 들어오신 해로 창립기념일자 8개월이 지난 11월 이었고, 2주년 때는 76년 봄 새가옥으로 이전(76년 4월 29일)하게 됨으로 생략 되었고, 3주년 때는 77년으로 도안스님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있던 때였다. 만약 교통사고가 없었다면 어쩌면 3주년부터가 도안스님이 주도했던 행사로 기록이 보존되었을 것이다. 78년(4주년)과 79년(5주년)에 이르러 창사기념행사가 도안스님에 의해 기록 보존되어 있어 이에 의하여 그때부터의 행적을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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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러던 가운데 1979년 3월 19일 미주에서는 최초로 도안스님에 의해 관음사에서는 KBS 방송망을 통해 이곳 로스앤젤레스 교포와 불자를 위한 첫 불교방송을 개설하고, 매주 월요일마다 2회에 걸쳐 방송을 해왔다. (위 사진은 그때의 장면)

79년 5월 20일은 3사(달마사, 수도사, 관음사)합동 부처님오신날 기념행사로 국제대학강당에서 [세계평화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를 개최했다. 이날 법회에는 약 800여명의 불교신자와 내외귀빈이 운집하였다고 기록했다. (이로보아 LA지역에서의 한국사찰로는 수도사가 3번째로 개원된 듯하다.)

79년 6월 5일 - 불교묘지 100기 구입 / [로스힐 메모리알 팍]과 계약을 맺는다. 이때부터 관음사는 신도들이 돌아가시면 묘지를 이곳에 쓰게 된다.

79년 7월 19일 - 서경보 박사 방문기념 설법회 / 이곳 CBS방송국 협찬녹화로 본국 KBS방송망에 방영되다.

79년 9월 23일 - 한국의 날 행사 / 관음사 참가 - 최우수상 받음

79년 11월 26일 - 전관응대종사 미국순방 반야심경특강 대법회(1주간)

이상을 살펴보면 79년은 나와 LA관음사와 업무상 연결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미불교의 교류흔적은 손경산스님, 서경보스님, 전관응스님만이 나타나 있다.

80년 봄부터 새로운 정국의 변동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불교계는 법난을 겪는다.


1) 80년의 한국불교계는 어땠을까. 조계사(집행부)측과 개운사(종회)측으로 양분돼 법정시비와 무력대결 등을 벌이며 팽팽히 맞서온 조계종내분이 3년 만에 수습됐다. 1980년 3월 30일 양측은 종회의원 총선에 합의한다. 1980년 4월 17일 전국 24개 교구에서 제6대 중앙종회 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여 69명의 종회의원이 선출된다. 4월 26일과 27일에 걸쳐 중앙종회가 개최되어 총무원장에 송월주, 종회의장에 황도견, 종회부의장에 유월탄과 정초우를 선출한다.
그러나 송월주 총무원장 체제의 출범은 3년 동안 계속된 조계사 측과 개운사 측의 종권분쟁을 완전 종식시키지 못하고, 법적인 통합을 이루는데 지나지 않았다. 당시 종회는 종정 선출 문제를 놓고 이성철과 최월산을 추대하려는 양측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에 조계사 측과 개운사 측 어느 쪽도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하여 결국 추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 7일 다시 종회를 열어 종정 추대를 재시도 했으나 총무원장과 종회 정·부의장 등을 모두 개운사 측이 독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조계사 측과의 분쟁은 다시 재현된다.
5월 13일 개운사 측는 조계사 측의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한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내부분열은 지속되고, 월주스님은 내부적으로는 자체정화의지로서 '불교정화추진본부'를 결성하고 외부적으로는 '불교관계법 개정요구 결의대회'등을 개최하였다.

시국은 79.12.12사태 이후 어수선하기만 한데, 그러나 80년 서울의 봄은 새로이 열리는 듯 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처음은 최규하 대통령 과도기 체제로 접어들면서 문민정치시대가 새로이 열리기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0년 연초에 들어선 국제불교도협의회는 기관지 국제불교회보 창간을 서두른다. 발행인; 최세경(회장), 편집인: 김안수(사무총장)로 정기간행물 등록을 문공부에 필했다. 곧바로 국제불교도협의회 임원소식과 함께 불교계 소식지 형식의 창간호가 발행되어 여러 곳에 배포했다.

이때 나는 무진장스님을 만나 창간축사 난에 한줄 축하말씀을 담게 했었는데, 그때 내게 부탁말씀이 미국을 한번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그래서 LA관음사 도안스님을 통해 한미불교 포교확대 교류를 위한 행사를 LA에서 열 것을 부탁하고, 당시 종단에서 활약에 뛰어난 분들을 선정해서 초청을 의뢰했다. 그때 초청인사로는 무진장스님, 박완일회장, 이종익박사 등이었다. 그 뒤부터 무진장스님은 LA관음사와는 깊은 인연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2월경엔 김구산교수가 나를 찾아온 듯 하다. 그때 나는 도안스님께 전화로 김구산교수를 미국으로 초청(LA동방대학-연결)해서 스님일을 돕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천거했다. 그 뒤 김구산교수도 관음사 도안스님 일(영어)을 도와왔다.

국제불교회보 창간을 본 박재원 부회장은 회보 간행물을 이용한 홍보전략에 깊은 관심을 표명한다. 이를 통해 활동무대를 펼치고자 4면에서 8면으로 증면을 했다. 그래서 박재원 부회장 활동무대를 폭넓게 마련한 방안이 안양의 이생-대한불교회관과 연계한 운동으로 [세계종교평화-한마음운동 본부]였다. 불교의 안목을 사회활동으로 적극화하자는 취지로서 일견 불교 사회운동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때 안양의 이생님은 “한마음”이란 슬로건 표현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은 듯 나를 뜻 높게 격려한 기억이 새롭다. 이생님은 이 한마음 슬로건은 국제간 불교교류지침 방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예견하셨다.

이때에 4월 중순 탄허스님을 모시고 지역 대규모의 설법대회를 주도하게 된다. 주최는 국제불교도협의회 한마음운동본부로 하고 집행준비에 관련된 모든 일은 박재원 본부장 휘하에 있던 익성회 멤버들이 도맡아 했다. 대전, 대구, 부산에서 각기 거행할 동 법회를 기획했다. 부산 구덕체육관 법회에서는 행사장을 입추여지 없이 가득 메웠고, 대구에서도 성황리에 마쳤다. 그때 익성회 30여 명 회원들은 대불련 관계, 천태종 관계 등 각종 조직을 동원하는 활동을 해서 그런 인파가 모였다고 박재원 부회장은 술회한바 있다. 부산 구덕체육관 행사에서는 2만 명은 체육관에 들어오고, 3만 명은 바깥에서 들었다고 했다. 익성회 회원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행사를 준비한 것이었다. 이때 탄허스님 강연내용은 불교 중심사상으로 선과 교, 화엄법계에 관한 설명이었다. 탄허스님의 법문집 〈부처님이 계신다면〉으로 설법요지를 집약 정리했다. 〈부처님이 계신다면〉의 출간은 우담거사가 만들 때에 박재원 본부장 종친회 사무실에서 했다. 그때 사무실이 허리우드 극장이 있는 낙원빌딩 314호실이었는데, 거기에서 작업을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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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구덕체육관을 입추여지 없이 가득 메웠던 탄허 큰스님 불교강연 대법회)

지금까지 대외활동이 전혀 없었던 국제불교도협의회는 박재원 수석부회장이 진두지휘해주는 원력으로 새롭게 불교계 기반을 확충해 나가던 때였다. 그러던 중 6월경 국내 정기간행물 보도검열이 실시됨으로 인해, 국제불교회보 역시 발행배포 이전 편집기사 사전검열을 받던 일이 있었다. 검열은 당시 서울시청 보도검열반에서 하고 있던 때다. 나는 국제불교회보 발행원본 복사본(스릴)을 가지고, 사회시사 풍자 자유시상 형식의 <5월은 슬프다>는 제하의 글을 통해 우리사회의 그늘진 곳들의 주변을 나열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붉은 줄로 지적된 것이 도저히 문맥을 이을 수가 없어 결국 모두 삭제하라는 검열지시를 받고, 그 자리에 박스처리로 박대통령 서거 애도를 담은 푯말로 대신하여 그 공백을 메운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언론보도 사전검열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 계엄령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다. 계엄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면서 정치활동 금지, 대학교 휴교령, 언론보도 사전검열 강화, 집회 및 시위 금지 등의 조치를 내린 때였다. 5월 18일 새벽 2시 신군부는 국회를 점령 봉쇄했고,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로 인해, 서울의 봄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던 때다. 그리고 최세경 회장도 KBS사장에서 7월 28일 물러나서 8월부터는 육영재단 이사로 가 있게 된다. 그 후 최세경 회장은 국제불교도협의회 회장직무는 더는 맡을 수 없다며 사임의 뜻을 내비쳤고, 후임자가 결정될 때까지 회장직무대행 체제를 언급하셨다. 하은려 이사장이나 방금봉 부회장도 마찬가지로 사무국 운영책임에 있어선 더 이상 전혀 무관심한 처지였다. 정국에 대한 변화가 너무나 급변하고 있어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시국이어서 어찌 처신해야 할지 매사 눈치만 살필 뿐 가늠하기 힘들던 때였다. 더구나 모든 정보통신과 언론이 완전 통제된 시국으로 정황판단을 해볼 길 없는 안개정국이 되어버렸다.

이런 가운데 불교계 기반을 다져나가던 국제불교도협의회 연계조직인 한마음운동본부 휘하 익성회는 사회운동 확장의 뿌리를 내리고자 점조직을 감행하고 있던 때였는데, 정당활동으로 변모하려는 듯 박재원 본부장은 내게 이에 대한 의견을 내비쳐왔던 것이다. 그때 나는 단호히 정당활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밝혔고, 오로지 불교조직 사회활동에만 몸담고 있으면서 측면에서 돕겠다고만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회장단은 오로지 박재원 수석부회장만 남아서 나를 돕고 있던 때라 10월초는 박재원 수석부회장이 이끄는 체제로 이사진 개편이 불가피하여 국제불교도협의회 이사회를 박재원 부회장 휘하 관리체제로 전반 개편하게 된다. 이때에 하은려 이사장은 본인분담 재정책임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있음을 들어, 이사들에 의해 새 이사장으로 다른 분을 임시로 교체해 놓고, 이사장 적임자는 후일에 다시 천거키로 한 상태였다.

이 시기에 도안스님은 일시귀국으로 9월 26일부터 약 보름간 체류하시면서 LA불교문화원 건립기금 조성을 위한 서화전시회 작품, 국내작가들로부터 200여점을 기증받아 이를 가지고 10월 11일 미국으로 들어간 때였고, LA현지 전시회 날짜가 10월 17일로 잡혀 있어서 나와 김철오 범종사 사장이 그 전시회에 참관하기로 되어 있어, 처음으로 미국을 여행하고 온 때였다.<이때 도안스님 일시귀국 시 내가 법련사로 뵈러갔을 때 무착스님도 와계셔서 그때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 것 같다.>

내가 그때 미국을 다녀왔을 때는 불교법난을 겪은 뒤였고, 법난은 국제불교도협의회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는지....,이어서 먼저 미국을 다녀 온 소식부터 나열하고 그 뒤를 잇기로 한다.

80년 10월 중순에 LA관음사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LA한인타운 8가에 위치한 삼일당에서 개최(10월17일)한 LA불교문화원 건립기금 조성을 위한 서화전시회에 참관하고, 그 뒤 미국 이곳저곳과 하와이를 경유 일본을 잠시 다녀 11월 중순 귀국했다.

나의 첫 미국방문은 귀국까지 범종사 김철오 사장과 함께 했었다. 관음사에 머물면서 우정의 종각, 달마사, 수도사, 헌팅톤라이브러리, 그랜드캐년을 다녀왔고, 하와이를 거쳐 일본을 들려 귀국했다. 하와이로 가기 전에 나는 78년 겨울에 들어오신 이상훈 선배님을 만나 미국생활을 물어본다. 노동의 신성함을 내게 말씀하신다. 내가 만난 곳은 수와밑 야시장에서 옷을 팔던 모습을 본다. 혼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꽤 수입이 많다고 했다. 그 당시는 한달에 4,000불이상의 순익을 보았던 모양이다. 고생하면서 가디나지역에 어머님 모시고, 정원이 넓은 집을 사서 묘목 나무도 길렀고, 꽤 재미있게 사신다고 했다. 무조건 나보고 미국으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불교활동에 대한 미련은 이제는 접으라고 하기도 했다. 멋진 겨울 외투를 사주셔서 입고 들어오게 된 때다.

나는 김철오 사장과 함께 일본에 잠시 체류 중에 귀국일정을 잡고자 김철오 사장이 홍법원 김정길 사장을 통해 한국의 정황을 전화로 알아보았다. 들려온 소식은 한국불교계가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다. 국내가 10.27법난으로 온통 아수라장이 된 상황을 듣게 된 것이다. 일본에 좀더 머물다가 들어오는 것이 좋겠다는 전언이다. 어찌할지 몰라, 그렇다면 기왕에 일본불교계를 일부나마 살펴볼 생각으로 당시 일본에서 고생하시며 유학중이던 임송산(무근)스님이 계신 곳을 찾아간 것이었다. 나와 김철오 사장이 송산스님의 안내로 그때 일본에서 고생하시며 한국불교개화를 위해 선구자로서 불교학문 전반연구에 몰두하시던 스님들을 잠시나마 찾아서 만난 분으로는 홍선스님, 도업스님, 세민스님, 태연스님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일본을 경유해 한국으로 귀국한 나는, 불교법난으로 인해 시국이 참으로 암담한 현실임을 체감하면서, 불교를 위해 무언가를 해보겠다던 미래지향적 의지감각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듯 했다. 우선 박재원 부회장님을 찾아뵈었다. 어처구니없는 법난으로 국제불교도협의회 박재원 부회장님 댁까지 수색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때에 이들은 원일당 창당 기미를 찾아내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아무것도 밝혀낸 것 없이 집안만 들쑤셔 놓았던 것 같다. 이 일을 겪은 박재원 부회장님도 이젠 급기야 도리가 없는 듯 국제불교도협의회에서 손을 떼겠다고 하신다.

80년 연말을 기해 나와 국제불교도협의회 운명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불교계가 사회악의 정화대상으로 둔갑되어 버린 것일까. 정교분리가 엄존한 시대에 어째서 이들은 그들의 정치에 지지선언을 못하는 온당한 종교계 처신을 빌미로, 누굴 위해 사회혼란을 부추겼단 말인가. 어쨌든, 법난 후속조치로 1980년 11월 5일에는 정화중흥회의를 출범시켜, 종헌개정, 중앙종회 해산, 산하기구 해체를 단행하고 이후의 종단운영을 승계했다.
<참고: 중흥회의는 81년 1월 총무원장 중심제로 종헌을 개정하고 종정의 임기를 10년으로 하는 등 종단운영의 새 틀을 짠다. 6대 종정에 성철스님을 추대하고, 18대 총무원장에 성수스님을 선출한다.>

뒤이어 1980년 11월 13일 계엄사령부는 비리승려 18명 구속. 32명 승적 박탈. 200억 6천만 원의 부정축재 재산을 종단에 환수 조치한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당시의 신군부는 제5공화국의 출범을 앞두고 집권 기반을 다지기 위해 정치적 정지작업에 나섰다. 80년 11월 전두환과 노태우(보안사령관)는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K-공작계획의 결과를 바탕으로 언론기관 통폐합방안을 마련한 다음, 정보기관을 동원해 각 언론사를 협박함으로써 언론 강제 통폐합을 시행했다. 전두환은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에 지시해 정치인별 신상카드를 가지고 정치활동 규제대상을 선정하게 하고 이를 결재해 사회정화위원회에 그 명단을 전달, 80년 11월 12일 811명에 대한 정치활동 규제조치를 발표하게 했으며, 정치활동 규제조치로 신군부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구 정치인들의 정치적 도전을 막기 위해 3김씨를 비롯한 500여명의 유력정치인들을 정치무대에서 퇴출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다시 새 정국이 열리는 시대로 81년을 맞이하게 된다. 81년 국제불교도협의회 존속여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음 편으로 이어 가고자 한다.

2) 80년 국내에서 내가 이러한 처지에 있을 때, LA관음사 80년은 무슨 일을 해왔나 살펴보기로 한다.(관음사 20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80년 1월 27일 - 정달법사 / 오렌지카운티 정혜사 개원

80년 2월 3일 - 박완일 서울신도회장 관음사 심방 - 성도재 강연 / 주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설법이 있었다.(이때 현호스님, 무착스님, 석지현스님도 함께 참석했다.)

80년 3월 9일 - 개원 6주년 기념법회를 통해 개원에 공이 큰 이용호, 이천용, 박상협, 정정달, 변창환, 서보리심, 김정법화, 김원만행 모두에게 종단으로부터 감사패 수여식을 가짐.
(그때의 기념사진에는 일본계, 태국계 및 스리랑카(라타나사라 승정)스님이 보인다)

80년 5월 22일 - 한국문화원 강당에서 부처님오신날 기념 학술세미나; 이능가대선사, 박성배교수, 김하태박사의 ‘종교의 사회 참여’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개최함.(이당시 고암대종사, 무진장스님, 성진스님, 이종익박사, 김구산교수, 김철교수, 라귀만거사도 관음사 방문 중)

80년 9월 23일 - 한국의 날 퍼레이드 행사에 관음사 꽃차 참가 - 열렬한 환영받음.

80년 9월 26일 - 10월 11일 / 불교문화원 건립기금조성 서화전시회 작품 200여점 준비(도안스님 한국방문 후, 관음사 귀사)

80년 10년 17일 오후 6시 / 8가 삼일당 화랑에서 서화전 개관 - 본국에서 구산대종사, 김철오, 김안수, 전영화, 전치환 참가 - 나성총영사 및 각 사회단체장 참석 / 6만2천불 건립기금조성(작품구입예약-약정).


(2끝)<2015.11.26.>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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