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안스님, 1974년에서 1978년까지 -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원대한 꿈을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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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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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1) 도안스님, 1974년에서 1978년까지 -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원대한 꿈을 간직한다.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1-04, (수) 12:59 pm

미국불교 움직임에 또 다른 한미불교연대의 꿈을 꾼다.
<이곳의 이야기는 도안스님 미국행로와 관련하여 나의 미국 이민생활로 연결된 이야기들을 담아 그때를 회고하면서, 떠나기 이전과 83년 이후부터 이어진 나의 미국이민 30년사의 기록을 담고자 한다.>

1) 도안스님, 1974년에서 1978년까지 - 미국으로 가게 되면서 원대한 꿈을 간직한다.

나의 미국이민의 꿈은 언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이를 더듬어 살펴본다. 나의 결정적 이민의 꿈을 지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는 도안스님이 직접적 관계가 되겠지만 그 배후에는 또다른 나의 절친한 친구 신동기 이었다. 신동기는 인천학익초등학교 4학년까지 동창으로 그 뒤는 서울로 와있던 친구였다. 1968년 가을에 돈암동 친구 홍순정과의 만남으로 첫 대면을 하면서, 그때는 미아리에서 화랑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꽤 친숙하게 지내던 사이다. 그리고 홍순정, 안상갑(돈암초등학교 동창), 신동기, 서광준과 같이 나는 녹야청년회를 발족했던 때다. 그리고 이들은 나의 71년 4월 결혼전날 처가댁에 함을 졌던 친구들이기도 하다. 친구 신동기는 그 뒤 곧바로 월남전에 갔다가 미국으로 이민해 있었다. 74년 가을에 와서야 고국방문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 미국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도안스님이 미국에서 활동했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함께 그 당시 LA한국불교계(달마사만 있었고, LA관음사는 74년 3월 정달스님에 의해 막 개원된 상태)의 상황을 알려줬던 때다. 그래서 그때 나는 신동기의 말을 빌려 도안스님께 미국 LA한국불교 상황을 상세히 전해주었고, 도안스님은 74년 가을에 한국을 방문 중인 정달법사를 만남으로, 그리고 다시 75년 6월 일시 체한중인 정법화보살을 만남으로 이때를 기해 미국행로를 걷게 된 것이다.

<1974년 가을 정달법사님이 고국을 방문하고자 탓던 항공기에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나의 죽마고우, 녹야원 청년회 불자였던 신동기가 같은 비행기로 전국체전 미주지역 참가자로 들어오게 되어, 공교롭게 서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만난 신동기는 도안스님이 미국 들어올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 뒤에 마침 정달법사님은 총무원(당시, 동국대 사회교육관 2층)에 들려 LA관음사 후임주지를 천거 받고자 이곳저곳을 살핀 듯 했다. 나는 정달법사님이 미국 들어가기 전 71년까지는 조계사 총무원 교무국장스님으로 계셨던 때로 매우 친분이 가까웠던 사이였기에, 그 때 고국을 방문한 정달법사님을 총무원 복도에서 만나게 되자, 도안스님을 미국으로 모시고 가라고 친구 신동기의 말을 빌려 추천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75년 6월말 경 일시 체한중인 부이사장 김정법화 보살을 도안스님과 함께 내가 만나서 LA관음사에 대한 정황을 듣게 되었고, 그 후 도안스님은 9월 10월 양차에 걸쳐 미국 입국초청장을 받게 되었으며, 여권수속은 모두 내가 맡아서 진행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미국으로 떠나려던 도안스님에겐 탑승할 항공권을 구입할 돈이 없었다. 출국 일정이 지연됨에 따라 2, 3차에 걸쳐 출국연기를 알리고, 이후 나의 큰누님께서 항공권 구입에 필요한 대금을 간신히 마련해 오신 것이어서, 그래서 1975년 11월 12일 새 주지스님으로 김도안스님이 LA관음사로 오시게 된 경위다.>

이렇게 돼서 도안스님은 미국에 가 있게 된 것이었다. 도안스님이 미국입국 절차에 있던 때는 나는 그 때까지 청소년교화연합회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었고, 77년에 들어서면서 국제불교도협의회를 창설하여 82년까지 한국에서 있으면서, 스님을 측면에서 도와가며 나로선 혼자 최선을 다한 때였다. 오직 스님이 미국에서 장애 없이 튼튼한 성장을 할 수 있기만을 염원하고 있던 때였다. 이 기간 중에 스님과 나와의 관련된 일들을 나열해 보고자 한다.

그 당시 국내 불교계 포교현실은 어떠했을까. 아래를 크릭하여 참고해 보도록 첨가한다.
[특집·기획] 불광 창간 1주년 기념 좌담회, 특집/오늘의 포교를 점검한다
때 : 1975년 9월 13일 곳 :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 상임포교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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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덕 큰스님; 한국불교의 현대적 중흥에 족적을 남기신 큰 별, 스님의 큰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오늘에 다시 살핀다. 아직까지도 그 일들은 계속 진행형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 같다.>

우선 도안스님이 국내에서 74년(정정달), 75년(정법화)의 LA관음사(주지)일로 첫 만남이후, 미국에 입국전까지의 LA관음사측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 관음사 20년사 연감의 기록을 짚어보면서, 당시를 살펴보자.

<1> 1975년 2월 9일 제2년차 총회에서 관음사 정관을 제6장 부칙 18조로된 대한불교조계종 미주(나성) 관음사 회칙(정관)으로써 관음총회에서 확정의결 하였음.
<2> 1975년 3월10일 있을 관음사 창립1주년 기념법회와 1974년 8월15일 서거하신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여사 1주기 추모제 및 불교사상 강연회 주재를 하기 위하여 김동채(도안스님)를 초청결의 하였음.
<3> 민족문화의 주류를 이어온 한국불교를 미국사회에 능동적이고 효율적으로 포교하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수행능력과 덕망이 높은 도안스님을 나성 관음사 제2대 주지스님으로 추대하기로 임직원들의 절대적인 찬동하에 1975년 3월 10일자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법하에게 나성 관음사 주지 발령을 의뢰 하였음.
<4> 1975년 5월 10일 정정달 주지가 주지직을 사임하고 관음사 운영관리와 법회지도를 최동수 법사에게 위임하였음.

위와 같이 LA관음사(정정달)로선 도안스님을 2대주지 승계자로 내정하고 75년 3월10일 창립1주년 기념법회를 기해 그 이전에 들어오도록 요청한 상태였던 것 같고, 그러다가 정정달법사는 75년 5월 10일로 주지직을 사임하고 관음사 운영관리와 법회지도를 최동수 법사에게 위임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도안스님 입장은 그 당시(정달법사가 조치한 그때)에는 즉각 75년 3월 이전에 들어갈 준비도 덜 된 때였고, 아직은 여러 가지 일로 관망했을 때다. 그래서 다시 일정을 잡고자 했을 때, 20년사 연감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LA관음사(김정법화)측은 다음의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1> 1975년 6월 15일 긴급 이사회의와 간부회의에서 신임주지 추천을 본국 강석주(전 총무원장)스님께 의뢰하기로 하고, 일시 체한중인 부이사장 김정법화 보살에게 추진에 대한 전권을 위임함. 이사인 권초수 보살이 원에 의한 이사직을 사임함.

이때에 75년 6월말 경 일시 체한중인 부이사장 김정법화 보살을 도안스님과 함께 내가 만남으로서 LA관음사에 대한 창건 배경과 정달법사 처지의 정황을 듣게 되었고, 석주스님께 불가피 주지추천 의뢰를 하게 된 LA관음사측 신도들의 입장설명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뒤 즉각 자연스럽게 석주스님(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스님)을 찾아뵙고, 정법화보살을 만나게 된 경위와 사정을 겸해서 보고 드렸고, LA관음사 주지추천 의뢰가 오면 도안스님을 해주시도록 간청해 놓았던 것 같다. 따라서 다음에 의한 관음사 20년사 연감의 기록을 보면 그때를 입증하는 듯 그 기록을 보이고 있다.

<2> 1975년 7월 5일 본국 조계종 녹야원 주지인 김도안스님을 LA관음사 주지로 강석주 대종사께서 추천하여 왔음.
<3> 1975년 7월 20일 관음사 정기법회 및 특별행사를 집행하기 위한 법사를 정정달 전 주지를 임명 결의하고 종단으로부터 파견되는 신임주지의 부임 때까지는 수고하여 줄 것을 부탁함.
<4> 그 후 도안스님에게 9월 10월 양차에 거쳐 초청장을 이사장 명의로 발송함. 여권수속관계로 출국일정이 지연됨에 따라 2, 3차에 걸쳐 출국연기를 알리고, 이후 1975년 10월 31일 불총인비 제1034호로 미국 로스엔젤레스 관음사 근무 [포교사]로 조계종 이서옹 종정으로부터 임명되었고, 1975년 11월 12일 새 주지스님으로 김도안스님이 LA관음사에 오심.

<이때에 도안스님 여권수속은 모두 내가 맡아서 진행을 했던 때인데, 그러나 막상 미국으로 떠나려던 도안스님에겐 탑승할 항공권을 구입할 돈이 없었다. 출국 일정이 지연됨에 따라 2, 3차에 걸쳐 출국연기를 알리고, 이후 나의 큰누님께서 항공권 구입에 필요한 대금을 간신히 마련해 오시어, 비로소 1975년 11월 12일 LA관음사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경위다.>

<5> 1975년 11월 14일 임시 이사회의에서 도안스님을 주지스님으로 정식추대 결의하고, 전주지 정정달 법사를 부법사로 최동수 법사를 청소년담당 법사로 임명 결의함.
<6> 1975년 11월 16일(일요일) 11시 30분 관음사 법당에서 내외귀빈과 전 신도가 모인 가운데 제 2대주지 취임식을 거행함.

그 뒤 그러니까, 미국으로 떠난 도안스님으로부터 한 달이 경과된 후, 종단에 의뢰하는 LA관음사 주지임명장 품신 추천의뢰서를 LA관음사 역원회의 서면결의 문서로 내게 보내왔기에, 이를 당시 총무원 총무부장 고산스님께 직접 찾아뵙고 올리어, 곧바로 12월 18일자로 임명장을 발급받아, 도안스님께 속달우편으로 보낸 바 있다. 그때의 일을 관음사 20년사 연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7> 1975년 12월 10일 역원회의(서면결의)를 통하여 본국 종단에 주지취임 추천의뢰서를 이사장 명의로 본국 종단에 발송하여, 동년 12월 18일부로 불총인비 제3655호에 의한 LA관음사주지 임명장이 발령되어 12월 24일자 봉수하였음.

그리고 76년을 맞는다. 도안스님이 본격적으로 관음사 불사를 시작한 곳은 451 S. Serrano Ave.의 독립가옥을 구입하고서 부터다. 76년 4월 17일 나성 3개 일간지 신문에 나성 관음사 확장 이전에 대한 안내광고를 내고 4월 29일 새 가옥으로 이전을 완료한 것이었다. 그리고 5월 9일 최초로 3개 사찰(달마사, 관음사, 삼보사) 공동주최 한국일보 나성지사 후원 봉축대법회를 한국일보사 소극장에서 성대히 개최하였고, 76년 5월 14일 에스크로를 통해 집명의를 ‘대한불교조계종 나성관음사’로 하고 매입에 대한 제반 수속을 완료 했던 것이다.(관음사 20년사 총연감에서 분석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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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사 연감에서 김정연여사 그때를 회상하며)

그리고 도안스님은 76년 9월 24일에는 서도창 인간문화재 김정연여사를 초청하여 LA한국일보사 소극장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김정연여사는 나와 도안스님은 한국에서 청소년교화연합회 창설 때부터 긴밀하게 인연을 맺어온 사이였다. 귀국한 이후 77년 김정연여사는 나를 댁으로 불러들여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LA관음사 방문(도안스님)근황을 설명하면서 나보고 미국에 들어가 곁에서 스님 일을 도와야만할 것 같다고만 하셨다. 스님 곁에는 믿을만한 사람이 있어야만 되겠다는 말씀이셨던 것 같다. 이때에 이르러서 나는 몸담고 있었던 청소년교화연합회(회장:이용택)를 떠나, 그때부터 새롭게 도안스님을 측면에서 도울 수 있는 방도를 찾으면서, 국내기반의 국제불교도협의회 창설을 진행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77년도부터는 나는 광화문 국제극장 옆길 코리아나호텔로 가는 길목 중간 작은 빌딩 꼭대기에 있던 조그마한 새사무실에서 국제불교도협의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나서 6개월후 77년 7월 정재호(회장) 하은려(이사장) 김안수(사무총장) 중심체제로 국제불교도협의회가 문공부로부터 정식, 인가등록이 나왔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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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국제불교도협의회 사무실로 쓰이던 곳, 나의 유일한 혈손 두 딸이 들렸던 때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 76년부터 이제 막 불사에 몰두하시던 도안스님께서는 77년 3월 5일 신도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프리웨이 고속도로 선상에서 기름탱크 추렐라에 받치어 크게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내가 한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것은 77년 6월 경 일시 귀국한 이연실(녹야원 학생회출신)보살로부터 듣게 되었고, 스님께선 걱정할 테니 알리지 말라 하셨단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듣고 국제전화를 올렸더니 지금은 그런대로 지낼 만하다 하셨다.

그리고서 도안스님은 영주권을 갖추고 처음으로, 77년 9월 5일부터 11월 10일까지 2개월에 걸친 첫 세계여행 일정을 마련하셨다고 했다. 도미 후 1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고국방문 길에 올랐고, 그때 나를 만나 하시던 말씀은 그간 큰 교통사고로 사경을 체험하고 살아오신 스님으로선 겸하여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인도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느냐 하시면서, 어머님(당시 67세)만 모시고 일본과 미국만 둘러보고 되돌아와, 유럽과 동남아여행을 마친 후는 LA관음사로 바로 귀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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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도안스님 첫 귀국에서 녹야원에 오셨을 때, 10년전부터 녹야원 어린이회때부터 성장해온 이들 불자들은 이제 성년이 다되어 스님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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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스님은 이때 해외여행 중에 특별히 관심을 기우리며 찍은 건물배경을 살펴보라는 뜻으로 내게 보내셨던 기념사진이다.-일본의 유명한 세계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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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봄, 용택스님이 나의 주선으로 도안스님을 곁에서 돕고자 LA관음사로 떠나기 전, 현호스님이 계시는 법련사에 들렸을 때 만났던 분들(가운데 앉은 3번째 조미령(배우)보살님, 그리고 뒷줄에 서있는 왼편에서 시계방향으로 현호스님, 자은스님, 김철교수, 법일스님, 용택스님, 오른편 끝 필자>

도안스님이 77년 가을 잠시 첫 고국방문을 하시던 때, 용택스님은 지방에 있었고 어디계신지 몰라 만날 길이 두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안스님을 LA에서 우선 보좌할 수 있는 스님은 그 당시는 용택스님 밖에 달리 찾을 길이 없겠다는 국내 현실이 파악됐던 바, 이 문제는 내가 맡아 책임지기로 하고 도안스님은 나에게 맡겨놓고 여행길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 뒤 나는 백방으로 용택스님의 거처를 찾아 확인해 놓고, 서울에 올라오면 곧바로 내가 만날 수 있도록 연락을 취해놓고 기다리면서, 78년 봄을 맞는다. 나는 그때 국제불교도협의회 최세경(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회장취임준비를 하던 때로, 또 이상훈(당시 문공부 종무국장과는 대학동창) 선배님과는 늘 사무실로 나오도록 해서 매일 만나 친밀히 하던 때라 용택스님이 78년 봄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서로들 인사를 나누게 하고 친하게 지낸 때였다. 그 뒤 두 분은 국제불교도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나 알게 된 분들로 용택스님은 78년 가을에 그리고 이상훈 선배님은 78년 겨울에 미국LA로 이민 길에 들어가신 분들이 된다.

위와 같이 용택스님은 LA관음사로 들어가게 된 것이고, 78년 5월 7일 석가여래본존불 봉불식 불상은 용택스님이 한국에서 조성하여 따로 먼저 보낸 것이었고, 78년 11월 19일 지장보살 봉불식 불상 역시 용택스님 주선으로 미리 조성을 부탁해서 나중에 들어가게 되어, 관음사는 이때에 3존불이 완전히 갖추어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첫 77년 11월 세계해외여행를 마치고 들어가신 도안스님은 78년에 LA관음사에서 하신 일은 무엇이 있었나를 살펴보자.(20년사 연감에서)

1978년 1월 8일은 하와이 대원사에서 고암 큰스님을 모시고 능가스님, 숭산스님, 도안스님이 집례하는 보살계법회가 이루어졌고, 일주일 뒤 곧바로 LA관음사는 1978년 1월 15일에 성도재일 기념으로 고암스님과 능가스님을 초청, 보살계법회와 강연회를 갖고 그리고 일요학교도 개설했다.

그리고 78년 3월 12일에는 개원 4주년 기념으로 김자운대종사, 윤현호스님, 최거해스님을 초정한 초청법회를 열고, 도안스님 77년도 인도성지순례 탐방기록 시사회도 곁들렸다. 이어서 다음달 4월 16일에는 자운대종사께서 집전하시는 수륙대제도 가졌다.(이때 LA관음사 행사에는 무착스님도 보인다. 현호스님은 이때부터 LA관음사 도안스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미국에 드나들며 LA고려사 창건 준비를 하셨던 것 같다. 따라서 용택스님이 미국 들어가기전에 내가 함께 법련사에서 현호스님을 만나뵙게 된 것은 현호스님이 LA관음사 개원4주년 행사 참석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원 4주년 기념사진에 찍힌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최보련화 보살님이 도안스님을 위해 줄곧 헌신하신 듯하다.)

78년 8월 18일에는 백종법회에 서경보스님을 모시고 천도재와 설법회를 가졌다. (그때 도안스님과 서경보스님께서는 탐브래들리 LA시장님을 뵙고자 시장집무실을 방문했던 기록이 있다.)

그리고 달포 뒤 78년 10월 1일 LA관음사에서는 손경산 대종사를 모시고 방미기념으로 “참된 자기란 무엇인가?”란 주제의 설법회를 열었다.(이때도 현호스님은 LA관음사 행사에 참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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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까지를 살피면서 1974년부터 78년까지의 나의 회고는 그 당시의 국내외 정세를 가늠해 보아야만, 내가 왜 그토록 미국을 향한 한미불교연대의 꿈을 꾸어야만 했던가를 짐작하게 될 것 같다. 우선 정세를 살펴보자.

고국 한국은 69년 3선 개헌에 이어 72년 10월 유신시대로 74년은 8.15광복 29주년 기념식장서 대통령암살을 시도했던 재일교포 2세 문세광(당시 23세)에 의해 결국 육영수 여사는 깨어나지 못하고 49세 나이로 유언 한마디 없이 오후 7시에 운명하신 비통의 한해였다. 한편 세계정세는 1960년대 후반부터 다극화를 중심으로 국제질서가 재편되면서 미국은 소련·중국과 화해를 추구하게 되었고,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박정희 정부에게 남북대화를 권고하고 있었고, 1970년 2월 미상원 외교위원회 한국문제 청문회에 나선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대사는 “남한이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음에 불만을 토로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의 일로, 남북관계가 급격하게 추진된 것과 무관치 않은 때였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국제불교교류는 이 시기에 비롯된다. 1970년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는 세계불교지도자 대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한국불교 주도의 첫 세계불교대회였다. ‘하나의 세계, 하나의 동포’라는 기치를 내건 세계불교지도자 대회에는 중국, 남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네팔, 파키스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티베트, 홍콩, 일본 등 동아시아 25개국 250여명이 참석했다. 이 대회를 주도한 인물은 청담스님과 능가스님이었다. 대회 본부장을 맡았던 능가스님은 1967년부터 청담스님 등과 논의해 세계불교연합 상설기구를 한국에 유치하기로 하고, 세계 불교계와 접촉을 활발하게 펼쳤다. 그 결실로 70년에 한국이 주도하는 첫 세계불교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었다.

이 행사는 기간 동안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은 불국사 등 사찰뿐만 아니라 판문점 등 분단의 현장을 둘러보고 한창 시작되던 산업시설도 시찰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은 각국 불교지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다. 국무총리 문공부장관, 농림부장관까지 만찬 오찬을 베풀었으며 행사는 워커힐 등 특급호텔에서 주로 열렸다.

이 행사의 주목적은 불교국제 상설기구의 한국 유치였지만 민간외교 측면이 강했다. 정부가 행사를 지원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은 북한과 국제무대에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한국은 1970년대부터 제5차 경제개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제무대에 활발하게 진출을 시도했다. 그 중에서도 유엔에서 발언권이 강하던 제3세계가 주 대상이었다. 그때까지 제3세계는 주로 북한에 우호적이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했다. 아시아의 제3세계 국가들은 대부분 불교국가였다. 이점을 정부와 한국의 불교계가 십분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1970년 세계불교지도자대회에 이어 1971년 10월 31일부터 11월 5일까지 세계고승합동대법회가 열렸다. 10개국 22명의 고승들이 참가한 법회는 능가스님이 주도해 범어사에서 열렸다. 1973년은 8월 26일 제2차 세계불교청년지도자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12개국 62명이 참석해 사찰과 공업단지 새마을 시범단지 등을 둘러보았으며 육영수 여사는 이들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 이어 9월 4일 룸비니개발에 한국불교가 적극 참여하기 위해 한국위원회가 창설됐다. 위원장에는 불교신자로 당시 국회문공위상임위원장인 육인수씨가 선임됐으며 전국신도회 김제원회장, 조중훈 한진그룹회장, 함병선 예비역장군이 부회장을 맡았다.

한편 한국은 WFB서울대회 개최를 위해 노력하지만 성사되지 못한다. 1973년 8월 26일부터 28일까지 세계불교도우의회 이사회가 한국의 타워호텔에서 열려 1975년 제11차 대회를 4월 23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하지만, 11차 대회는 1976년 2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다.

한국불교의 국제무대 진출은 정부의 외교정책에 발맞춰 진행됐다. 세계연방평화촉진 종교지도자대회, 홍법대회 등 다양한 국제불교 행사가 있었지만 그러나 한국불교가 주로 활동한 무대는 WFB 각국순방 ‘세계불교도대회’의 참가가 위주였다.

세계불교도우의회를 통한 한국대회를 유치하려면 역시 정부의 지원과 이에 따른 사전준비의 종단 재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간 1966년 후반부터 한국 개최가 몇 차례 나왔지만 우리 측의 준비 부족, 열악한 환경 등으로 인해 무산됐다. 그 대신 다양한 형태의 세계불교대회가 마련된 것뿐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있음을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에서 국제불교도협의회를 어떤 방식으로 이끌려고 감히 그 창설에 주도적인 열정을 보였을까, 이는 도안스님이 75년 11월 미국으로 향하게 됨에 따라 한미불교연대운동의 그 초석기지로서 발판을 한국에 설치해보고자 함이었고, 아울러 세계불교 움직임에 따른 한국불교 민간국제교류기구로서 활약을 펼쳐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시절인연이 아직까지도 충족되지 않아 중도로 끝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77년부터 82년까지 6년에 걸쳐 국내에서 펼쳐보았기에, 그리고 그곳에서 그간에 도안스님과 LA관음사에 관련된 일들을 도와왔기에 이를 살펴보는 것이며, 그 뒤는 미국이민으로 들어섰지만 새로운 연장선상에서 그 꿈을 이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를 다음 편을 보아가면서 관련의 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1끝)

<2015.11.24.> 제월무염 김안수(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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