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5 한국불교, 전법포교에 더 적극적이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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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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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COLON 2016-11-29, (화) 5:42 am

기획시리즈-5 한국불교, 전법포교에 더 적극적이어야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7-02-02, (목) 1:01 pm

우리불교가 전환점에 이르렀다고 하면, 대부분의 불교계 사람들은 잘 믿으려하지 않는다. 방안에서 밖을 보면 훤히 내다보이고 때로는 신선감 마저 느끼게 되는데, 반대로 밖에서 안을 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안을 들려다 볼 수가 없다. 게다가 안에서 안을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이 오지 않는다. 항상 보고 있기 때문에, 안의 모습이 잘되어 있는지 아니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비유가 좀 약하지만, 지금 우리 한국불교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답은 간단하다. 어딘가 잘못 굴러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불교인들은 별로 느낌이 없는 것 같다. 20-30년 전의 한국불교를 뒤돌아보자. 흔히 하는 말로, 조계사 앞을 지나가는 스님의 수가 하루 평균 5백 명은 넘는다고 했다. 항상 스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한국 땅 어디에서나 승복 입은 스님을 본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과연 그 시점에서도 우리는 한국 땅 어디에서도 스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사진1: 인도 사르나트(Sarnath), 녹야원에 있는 다메크 스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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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성도 후에, 처음 함께 수행 정진했던 도반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먼저 제도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진정한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적어도 전법(傳法)을 하려면 최초의 도반 5명을 먼저 설복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보드가야에서 녹야원으로 직행했다. 갠지스 강변을 거쳐서 녹야원 공원으로 간 부처님은 먼저 5비구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부처님을 보자마자 깨달은 자란 것을 바로 알아보고 무릎을 꿇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부처님은 이들 최초의 5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는데, 나중에《전법륜경 轉法輪經》으로 체계화되었다. 빨리어로는《담마차카 빠와따나 수따(Dhammacakka ppavattana Sutta)》라고 하며, 산스끄리뜨어로는 《다르마차크라 프라와르타나 수트라(Dharmacakra Pravartana Sūtra)》이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경’이란 이름으로 체계화 되었는데, 여기서 설한 중요한 불교사상은 ‘중도’와 ‘사성제’였다.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이 되는 불교 기초교리이다.

사진2: 캐나다 퀘벡의 한 베트남 사원에 조성된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을 묘사한 동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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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께서 설법을 시작함으로써 불교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수행도 중요하지만, 전법포교 또한 아주 중요하다. 도를 이루고 인격완성을 했으면, 깨달음을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혼자만의 도인이란 있을 수가 없다. 혼자만의 도인으로서 은둔해 버린다면 이것은 불교정신에 어긋난 일이다. 도교 같은 불교일 뿐이다.

사진3:실론에서 녹야원에 세운 물라간다쿠티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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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녹야원에 있는 티베트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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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실론이나 티베트 등의 불교국가에서는 전법포교를 매우 중요시 한다. 아무리 훌륭한 종교적 교리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전도(傳道)를 통한 교도(敎徒)를 모으지 않으면 허수아비 종교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므로 세계의 종교들은 자기의 종교교리와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교주의 깨달음도 전법 포교를 통한 교도의 다과(多寡)에 좌우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교주의 깨달음이 수승하고 교리적 체계가 잘 되어 있고, 철학이 뛰어난다고 해도, 이를 널리 알려서 전파하지 않으면 교세(敎勢)가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타종교에서 이런 교훈을 배우게 되는데, 배우고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우리 종교의 미래는 불을 보듯 훤해진다.
모두에서 우리 한국불교의 20-30년 전의 현상을 언급한 바 있다. 그때의 한국불교는 승승장구할 것으로 생각했다. 모두들 사찰 건물 짓기에 열을 올렸다. 지나치게 건물만 많이 짓고 전각(殿閣)만 단청으로 잘 장식하는 등, 사찰의 외관 가꾸기에 공을 들였던 것은 불교의 미래와 무관하지 않았다. 항상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불교의 미래를 분석하는 능력이 부족했던 것을 솔직히 시인해야할 상황에 직면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앞으로의 10년 20년 후를 예측해 보자. 과연 한국불교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너무나 비관적인 예측이 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불교계 인사들은 불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도인 같은 생각과 말을 쉽게 하는데, 정말 위험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지난 20년 전의 한국불교를 보면 앞으로의 20년이 훤히 보이는데도 이를 보지 못하고, 우리 불교가 항상 잘 굴러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뭔가 보는 눈이 모자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세계불교계를 한눈에 살펴보건대, 우리 한국불교의 미래가 가장 불투명하다고 한다면 모두들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사실, 객관적인 조건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불교가 한국불교란 것을 인지한다는 것은 상당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그만큼 다른 나라 불교도 많이 봐야 하는데, 방안에서 이런 바깥의 불교를 본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불교만 본 분들은 앞으로의 한국불교를 낙관적으로 보는데, 필자는 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금 전법포교에 대한 뼈를 깎는 환골탈태의 혁신이 없이는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다. 지금 한국불교는 수행도 어느 정도 잘하고 있고, 사찰들 마다 전각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방사도 충분하다고 본다. 하지만, 스님들이 보이지 않고, 불교를 알리는 전법 포교의 노력이 없다면 이것은 매우 불안한 징조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혹자는 이런 우려에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런 분들은 한국불교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뭔가의 색안경을 끼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타종교의 교세와 분위기는 불교를 사면초가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상태로 계속 나간다면 과연 불교의 모습이 그대로 제 모습을 간직 하겠는가 이다. 고로 전법과 포교는 수행보다도 더 중요하다. 승가에서 못하면 재가에 맡기는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수행정진은 좋은 풍조이다. 하지만, 전법포교를 외면하고 수행위주의 불교로만 나간다면, 포교는 누가 하는가이다. 전법포교의 주체는 승가이다. 재가의 전법포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승가에서 재가에게 어느 정도 포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한국불교는 아직도 이 점에 있어서는 너무 보수적이다. 교세가 갈수록 약화됨에도 재가에게 포교 권은 줄 수 없다는 것이 승가의 속내이다. 일부 법사나 재가포교사들은 자신의 힘겨운 역량으로 포교일선에 나서고 있는데, 이래서는 전법포교가 제대로 이뤄질 수는 없다. 불교내부의 법적장치가 마련되어야 하고, 승가가 다 하겠다는 고집은 버려야 한다고 본다. 승가는 수행, 재가는 포교 이렇게 역할 분담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구조이다.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한, 교세확장을 위한 방안으로서의 건설적인 제안을 해 본다.

해동선림원=지도법사 보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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