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검법사 인도기행-27 / 브리티시 인디아와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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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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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검법사 인도기행-27 / 브리티시 인디아와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전체글 글쓴이: lomerica » 2016-12-13, (화) 10:50 am

브리티시 인디아와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사진1: 윌리엄 존스 경이 1784년에 설립한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콜카타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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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윌리엄 존스 경(1746–1794), 대영제국 대법원 인도 벵갈(콜카타) 지역 하위 판사,
문헌학자이 기도 했던 그는 인도-유럽어족의 관계성을 제기하고, 1784년 ‘벵갈 아시아틱 소사이어티’를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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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인도여행에서 뜻이 매우 깊은 것은 인도 아시아 연구의 본산이었던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틈만 나면 이곳 도서관에 가서, 아시아틱 저널을 창간호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방대한 자료다. 이 아시아틱 저널만 제대로 리서치해도 인도학 연구는 체계가 선다고 할 수 있을 정돌 값진 자료다. 이 아시아틱 소사이어티가 창립되고 저널이 발간되게 된 역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인도이해의 한 채널이 될 수 있다.

유럽의 열강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식민지화 하면서, 이들 나라의 역사와 언어와 종교를 만나게 된다. 열강의 관료나 군인가운데서 학자적 소양이 있었던 사람들은 동양의 언어와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른바 동양학의 연구와 체계가 필요함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학문적 호기심도 발동했지만, 식민지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역사 언어 종교 등 모든 인문학적 분야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통치에 보탬이 되는 자료제공 성격으로 출발했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학문 그 자체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서양의 인문학과 등치(等値)되는 영역임을 이내 알아차리게 되었다. 더욱이 관료나 동양학자들을 흥분시키게 된 결정타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가 유럽의 제 언어와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인종 또한 멀리 올라가면 한 조상이라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인식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이런 뉴스가 유럽의 지성계에 알려지면서 이른바 동양학 열풍이 불게 된다. 이런 기미는 이미 17세기부터 조짐이 보였고, 18세기에 이르러서도 소수의 학자들에게 가설로 수용되었지만, 결정적인 적인 것은 18세기 말경, 윌리엄 존스 경(Sir William Jones 1746–1794)이었다. 그는 영국의 문헌학자이면서 영국 대법원 인도 벵골 지역의 하위 판사였다. 학문적 호기심이 발동, 인도 언어에 관심을 갖다가 우연히 인도의 언어들이 유럽어의 제어와의 연관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산스크리트어를 연구하기 시작, 인도-유럽어족의 관계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사진3: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도서관에 보관된 아시아틱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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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존스 경의 아버지는 웨일스 출신 수학자였다. 윌리엄 존스 경은 런던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언어에 뛰어났다. 그는 영어, 웨일스어 외에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아랍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중국어의 한자를 쓸 정도로 언어천재였다. 그는 그의 생애 말년에는 1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28개 언어가 더 가능했던 다국어 천재였다. 아버지를 세 살 때 잃고, 어머니의 손에서 양육된 그는 옥스퍼드를 가정교사를 하면서 졸업했다. 24세 무렵에는 이미 번역으로 명성을 얻었고, 1770년부터 3년간 미들템플 법학원에서 법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26세인 1772년에 왕립학회의 회원이 될 정도로 명성을 얻었고, 웨일스에서 순회판사를 했고, 1783년에는 대영제국대법원 인도 벵갈 지역 하위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급진파이기도 해서, 친 미국 독립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인도로 부임했을 때는 인도는 유럽의 학자들에게 아직은 미개척지였다. 그는 베다를 공부하고 산스크리트어를 본격적으로 학습했다. 근 10년간 인도학에 몰두한 나머지 인도 아 대륙의 모든 사회과학 인문 분야의 근대학문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현지 법률, 음악, 문학, 식물학과 지리학 관련 책을 쓸 정도로 인도학 전반에 박학했고, 인도문학의 중요한 작품을 최초로 영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47세란 나이로 1794년 요절했고, 그는 콜카타의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786년에 개최된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발표회에서 제안한 산스크리트어와 그리스어, 라틴어가 공통 뿌리라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 다른 유럽어의 제어와도 관련성을 제기했다. 그가 인도-유럽어의 관련성을 치밀하게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 같은 관찰은 유럽의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물론 윌리엄 존스 경의 관찰보다 앞서서 16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유럽인들은 인도어와 유럽어의 사이에 유사성을 알게 되었고, 1653년 유럽의 한 학자가 인도(이란)-유럽어의 원시언어에 대한 책을 썼고, 1787년 프랑스 아카데미의 한 회원이 산스크리트어와 유럽제어의 유사성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윌리엄 존스 경은 산스크리트어 이란어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와 켈트어를 결합하는 ‘원시언어’를 가정했다. 그의 가설이 선행학자들 보다는 정확도 면에서 떨어지고 인도-유럽어족에 이집트어 일본어와 중국어를 포함하고 힌디어를 생략한 것은 그의 실책이기는 했지만, 문헌학자로서 비교언어학과 인도-유럽어 연구의 통로란 명성을 얻었다.

이로써 유럽에 인도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인도학(Indology) 연구가 성립하게 된다. 인도학이란 아시아 연구의 한 부분으로서, 인도 亞 대륙의 역사 문화, 언어와 문학의 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여기서 인도 아 대륙이란 현대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몰디브, 네팔과 동부 아프가니스탄을 일컫는다. 인도학은 인도의 종교인 자이나교 불교와 빨리문헌과 시크교와 함께 산스크리트문학과 힌두교의 연구를 포함한다. 남인도의 드라비디언 연구는 별개의 가지로 분리시킨다. 일부학자들은 현대 인도학과 고전 인도학을 구별하고, 고전 인도학은 산스크리트어와 다른 인도 고전어 출처에 더 집중하고, 현대인도학은 정치와 사회학을 위주로 한 현대의 인도가 되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가 지금 관심을 갖는 것은 고전 인도학 연구이다.

사실 인도연구는 기원전 4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그리스 대사인 메가스테네스(350–290 BC)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재위 322-298 BC)의 궁정에 파견되어 인도에 대한 4권의《인도》란 소개 책을 저술한 바 있다. 지금도 파편으로 존재한 이 책은 지리학자들인 스트라본(기원전63-기원후24년경)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부 라이한 알-비루니(973–1048 AD)는 페르시아 학자로서 인도의 정치 군사에 대한 역사와, 인도의 문화, 과학, 사회 종교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는 또 인도의 인류학을 비롯하여 인도어를 구사할 정도로 인도에 대한 박식한 지식인이었다.

근대기인 18세기 말경에 윌리엄 존스 경을 비롯한 헨리 토마스 콜부룩, 오거스트 윌헬름 슐레겔 등이 인도학 연구의 개척자들이다. 19세기에 이르면 인도학은 보다 학문적 주제를 다루기는 했지만, 브리티시 인디아(영국인도)라는 문맥에서, 낭만적 동양학에 대한 연구로서 아시아학과 함께 인도학 연구가 나타나게 되었다. 1784년에는 윌리엄 존스 경에 의해서 아시아틱 소사이티가 캘커타(콜카타))에서, 1822년에는 소시에테 아시아티크(프랑스)가, 1824년에는 로열 아시아틱 소사이어티(영국)가, 1842년에는 아메리칸 오리엔탈 소사이어티(미국)가, 1845년에는 저먼 오리엔탈 소사이어티(독일) 등의 일종의 아시아(동양학) 학회가 창립되었다. 일본은 1949년 인도학 불교학 일본협회를 발족했다.

185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성 피터즈버그(러시아)에서 산스크리트 문학 연구가 체계적으로 연구되었고, 1879년 영국에서 힌두 텍스트 위주의《동방성서》가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발간되고, 1887년에는 인도 고전 문법학자인 파니니의 문법서가 독일에서 발간되고, 막스 뮬러에 의해서《리그베다》가 1849-1875년 사이에 출현하고, 1897년에는 세르게이 올덴부르크가 산스크리트 텍스트인 불교문고를 편집.발간했다.

이처럼 유럽(러시아 포함)에서는 아시아(동양학)연구의 한 부분으로서 인도학 연구가 붐을 이루게 된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신종교인 삼보 불교종과 상가락쉬타 법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통과해야할 통로로서 유럽의 동양학 연구 배경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욕심에서 장황한 설명을 하고 말았다. 상가락쉬타 법사는 인도에서 20년을 보내면서 그의 지식은 바로 유럽 학자들에 의한 인도학(Indology)과 불교학(Buddhology)이 원천이 된다고 했다. 상가락쉬타 법사가 인도에서 활동할 시기의 인도학과 불교학은 절정을 이루었고 아카이브(Archive)가 상당히 갖춰져 있을 시기이다. 이것은 그의 인도학 불교학의 원천이 된다고 그는 그의 회고록에서 고백하고 있다. < 이치란 박사 정리>

아시아틱 소사이어티 못지않게 유명한 곳은 세계대각회인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이다.

사진4: 인도 콜카타에 소재한 대각회 본부. 실론 출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1892년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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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찾는 불교도들은 대개 불교 4대 성지(聖地)를 순례한다. 4대 성지라고 한다면 보드 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그리고 룸비니(지금은 네팔 령) 동산이다. 특히 인도에 있는 사르나트나 보드 가야는 불자라면 필히 가보고 싶은 불교성지이다. 보드 가야는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한 곳이고,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성도하고 난 후, 처음으로 깨달음을 사회화한 곳이다. 이렇게 중요한 불교성지를 복원하여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신 분이 바로 실론 출신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이다.

전회(前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미국의 신지학회(神智學會) 회장인 스틸 올코트 대령의 영향을 받았다는 소개를 한 바 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브리티시의 저널리스트이며 시인이었던 에드윈 아널드의 도움을 받아서 1891년 대각회(Maha Bodhi Society)를 창립했다. 창립목적은 인도불교의 소생과 고대불교유적지인 보드 가야(Bodh Gaya), 사르나트와 쿠시나가라 등지의 불교유적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왜 실론 출신인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이렇게 불교성지를 복원하려고 대각회(大覺會)를 창립하게 되었는가.

불교가 인도에서 거의 소멸한 다음에는, 일부 불교도들조차도 자신들이 ‘불교도’라는 정체성이 없었다. 그만큼 인도불교계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인도에서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라다크 불교협회, 전(全)아쌈불교협회, 히말라야불교회와 달리츠 불교운동 등에 주목해서, 이들을 이끌어 줘야할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런 운동을 전개하게 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누구인가를 브리핑할 필요가 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태어날 즈음, 실론은 브리티시의 직할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듯이, 실론도 이미 영국식 이름을 갖는 것이 풍조였다. 그는 실론의 무역상인 가문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이름은 돈 데이빗 헤와위타라네(Don David Hewavitharane)였다. 그는 기독교계학교에 들어갔고, 왕립학교인 콜롬보 아카데미(대학)에서 공부했다. 전회에서 이미 소개했지만, 올코트 대령이 실론에 와서 활동할 때, 돈 데이빗 헤와위타라네는 신지학회에 가입하고, 돈 데이빗 헤와위타라네라는 영국식 이름 대신,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란 법명으로 개명(改名)했다. 아나가리카(anāgārika)란 말의 뜻은 ‘집 없는 자’의 의미이다. 집이 없는 자란 바로 출가 수행자를 의미한다. 다르마팔라 (Dharmapala)는 불법을 보호하고 지킨다는 법호(法護)란 뜻 정도의 의미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에서 아나가리카는 출.재가(出在家)를 막론하고 집을 떠나서 수행의 길로 들어선 구도자(求道者)를 이렇게 불렀다. 불교가 아사직전이었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실론불교에는 이런 수행자들이 있었다. 쉽게 말하면 출가 비구와 재가 신도사이의 중간 정도의 신분인 우리식으로 말하면 포교사나 법사(法師) 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신도는 5계를 지키고, 출가 비구는 227계(대승에서의 빅슈는 250계)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나가리카는 8계(戒)를 지키도록 되어있다. 사실 이런 분들이 많아야 불교가 든든해진다고 본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황색 가사는 입지 않았고 삭발도 하지 않았지만, 8계 이상의 계율을 지키면서 실론의 곳곳을 누비며 수행과 불교 부흥운동을 했다. 그는 실론에서 유명인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실론출신의 보살로 통했다. 이럴 즈음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에드윈 아널드 경(Sir Edwin Arnold )의《아시아의 빛(the light of Asia)》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노래한 담시(譚詩)에 감화를 받아서 1886년 인도 보드 가야 행(行)을 하게 된다. 에드윈 아놀드 경은 실론의 웰리가마 스리 수망갈라 장로(Weligama Sri Sumangala Thero ,1825-1905)의 격려와 고무에 힘입어서, 보드 가야의 복원과 불교도들의 보호를 받아야 된다고 주창(主唱)했다. 그러면 에드윈 아널드 경은 누구인가. 잠시 살펴보자.

에드윈 아널드 경은, 영국 한 지방의 행정도지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런던大와 옥스퍼드大를 나와서 교사를 하다가 1856년 인도 뿌나에 있는 국립 산스크리트 대학 교장이 되었다. 7년간 근무하다가 영국에 와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신문 기자가 되었고, 이후 40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도 문학 활동을 했고, 고산등반(高山登攀)을 하고, 아프리카 사막을 횡단하는 탐험가 등으로 활약하면서 1879년《아시아의 빛 the Light of Asia》을 발표하자, 일약 유명해졌다. 잠깐 사생활을 살펴보면, 전 부인들의 사별로 세 번째 부인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정황을 보면, 그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문학 사상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동양의 정신문화를 사랑했었던 것 같다.《아시아의 빛 the Light of Asia》은 대승경전으로 부처님 일대기(一代記)라고 할 수 있는『보요경 普曜經 The Lalitavistara Sūtra 』에서 내용을 자유롭게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일본 터키 페르시아와 시암에서 훈장을 받았고, 아나가리카 다르마필라와 대각회를 공동 창립했다. 다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로 돌아가 보자.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인도방문과 대각회 창립 이후, 1893년 시카고의 세계종교의회(世界宗敎議會)에 남방불교 대표 자격으로 초청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 힌두 구루인 스와미 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1863-1902)를 만나서 인도의 종교 문제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보드 가야를 비롯한 불교 성지에 힌두 승려들의 핸들링에 대해서 설명했다. 스와미 위베카난다는 힌두 승려로서, 성자 라마크리슈나( Ramakrishna 1836-1886)의 제자이다.

다르마팔라는 1896년 미국을 재방문하고, 1902년에서 1904년 사이에 미국의 여러 단체로부터 또 초청을 받는다. 하와이에서는 카메하메하 (Kamehameha the Great 1738-1819) 대왕의 후손인 마리아 E. 포스터 여사를 만나서 엄청난 액수의 보시를 받게 되는데, 그가 받은 백만 루피는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거의 미화 3백만 불 상당이다. 그는 이 돈으로 실론에 학교도 세우고 대각회 활동을 위해서 시드머니(seed money)로 활용하게 된다.

이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탐색해 보자. 젊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올코트 대령의 일을 거들었다. 그는 주로 통역을 담당했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마담 블라밧츠키 여사와도 가깝게 지냈다. 이때가지만 해도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빨리어에 능통하지 못했다. 마담 블라밧츠키 여사는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에게 빨리어 습득을 권했고, 인류를 위하여 무엇인가 헌신하고 봉사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가 1885년에 처음 인도에 갔을 때는 대각사가 복원되고 있었으나, 재차 보드 가야에 갔을 때인 1891년에는, 부처님께서 성도했던 그곳에 대탑인 대각사(Mahabodhi Temple)가 어느 정도 복원되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큰 충격을 받게 되는데, 불교도의 사원인 대각사가 힌두 승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불상은 힌두교의 한 신상(神像)으로 변해서 한쪽 구석에 안치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잠겨있는 빗장을 열고 들어가서 참배할 정도였다. 이에 그는 흥분했고, 이들에게 항의했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에게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실론에 돌아와서 즉각 콜롬보에서 대각회를 설립했고, 이듬해인 1892년 캘커타로 본부를 옮겼다. 캘커타는 당시 브리티시 인디아의 수도였다. 첫째 목적은 보드가야의 대각사를 비롯한 사르나트 쿠시나가라 룸비니 등의 관리 운영권을 힌두 승려에서 불교도가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불교 유적지에 있는 조그마한 규모의 사원들은 몇 세기에 걸쳐서 운영해 온 힌두 브라만 승려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고, 무슬림들에 의해서 파괴되어 있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이들을 물러가도록 법원에 고소했다. 장기간의 분쟁 끝에 인도가 독립한 후에 이들을 물리치고 불교 승려가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런 결과는 인도가 독립한 1947년 후에야 가능했고, 다르마팔라가 입적한지 16년 만인 1949년에 일부의 권리를 인정받았고, 보드 가야의 대각사 운영관리위원회에 힌두와 불교가 동수로 멤버를 구성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1933년에 입적했는데,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신지학회와 결별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불교는 신비주의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신지학회 멤버들이 힌두의 크리슈나 신을 공고히 신봉하는데 대한 이념차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실 신지학회를 통해서 그는 세계무대에 데뷔했지만, 이념갈등으로 이들과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신지학회는 어떤 단체인가.

신지학회(神智學協會, Theosophical Society)는 1875년, 제정러시아에서 태어난 독일계 헬레나 페토르브나 블라밧츠키(1831-1891)여사가 스틸 올코트 대령과 윌리암 콴 판사와 함께 뉴욕시에서 창립한 일종의 신비사상(주의) 결사(結社)이다. 여기서 장황하게 내용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한 때 상당한 파급력을 가졌던 일종의 인간지성과 신에 대한 연구단체로서 신비주의적인 단체이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은 마담 블라밧츠키 여사이다. 그녀는 러시아의 철학자라고 불릴 정도로 이 분야에 상당한 식견을 가졌었고, 신비주의적인 카리스마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녀와 올코트의 신지학회는 실론에서는 불교근대화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상좌부 불교부흥운동에 그리고 인도에서는 힌두 개혁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가 실론에서 불교부흥운동을 전개하고 대외적으로는 대각회를 설립해서 인도의 불교유적 성지 보호와 복원운동을 벌이면서, 인도불교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지원했다. 이런 결과로 인도에서의 불교 성지는 보다 활성화되고 세계 여러 불교 나라의 불교도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불교도들이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홍보역할을 한 공로는 너무나 크다고 할 것이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몇 권의 저서를 남겼는데, 특히 그가 남긴 일기는 영국 출신, 법사 상가락쉬타가(Sangharakshita 1925-현재)가 정리해서 1996년 출판했고, 이보다 앞서서는 그의 연설, 수필 편지 등 전집이 1965년 교육문화부에서 아난다 구르게(Ananda Guruge 1928-2014) 박사에 의해서 그의 편집책임으로 출판된바 있다.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는 이른바 신(新) 불교, 과학 불교, 프로테스탄트 불교를 주도해서 불교근대주의(佛敎近代主義)를 확립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상가락쉬타 법사는 인도에서 오랫동안 불교수행을 하면서 인도불교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은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고 있고, 상가락쉬타 법사는 영국에서 서구불교종단우의회(FWBO)를 창립해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아난다 구르게 박사는 스리랑카 외교관 불교학자와 작가로 활동하신 분이다. 이 분들에 대해서도 다음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차회에서도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의 인도에서의 대각회의 활동과 현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치란 박사 정리>

콜카타는 문화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다른 도시에 비교해서 영문 서점도 여러 곳이다. 책값도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어서, 필요한 참고서를 제법 구입했다. 귀국할 때는 가방을 새로 사서 책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가방이 무거웠다. 이번 인도 여행은 이 정도 선에 마무리하고 다음 기회에 다른 측면에서 인도를 해부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5: 콜카타 시내 한 영문 서점에서 지배인과 담소를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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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선림원 지도법사=보검(이치란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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