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적 시선으로 서양사 서술하고파”
서재탐방 | 민희식 前한양대 불문학과 교수

 

2012년 04월 23일 (월) 18:42:55

 

프랑스 유학가서 ‘법화경’ 만나

“성경 자체가 불교 안에 다 있었다”

하루 세 권 씩 일 년에 천 권 독서

   

민희식 교수는〈법화경과 신약선성서〉 〈성서의 뿌리〉 〈예수와 붓다〉 등 불교 속에 성경의 내용이 있다는 저서를 여러권 펴내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의 서재에는 8만여 권의 책이 있다.

4월 16일, 오랜 시간 인문학과 종교에 대한 글을 써왔던 불문학자 민희식 교수(78)를 만나러 성북동을 찾았다. 봄볕은 따뜻했고 하늘은 맑았다. 봄꽃은 활짝 피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웠다. 멀리서 마중 나온 머리카락이 하얀 민 교수가 보였다. 그의 모습이 가까워질수록 맑고 밝은 표정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오랜 동안 책 읽고 사색하고 글 쓰고 강의하며 학자로서 살아온 삶이 고스란히 얼굴에 담겨 있었다.

민 교수의 서재는 2층에 있었다. 책만 쌓여 있는 방을 지나 들어선 서재에는 역시나 온통 책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평생 번역과 저술에 매진해온 노교수의 서재는 책과 흔들의자 하나와 탁자가 전부였다.

민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대전에 있는 서재까지 합쳐 8만여 권. 일어를 비롯 불어 독어 등 외국어로 된 책을 통해 그는 세상과 만난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냉철하고 논리적인 학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불교는 예외인 듯 보였다. 민 교수에게 불교는 신앙이었고 과학이었고 논리였다. 그래서 그는 성경마저도 법화경에서 가져왔다고 할 만큼 불교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불문학도였으니 50년대 프랑스 유학을 가서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됐어요. 저도 거기서 불문학 공부를 해야 했으니 성경을 읽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느낀 게 그쪽 사람들은 자국 문화에 자부심이 아주 크다는 거였어요. 그때 깨달았죠. 서양 것을 알기 전에 우리 것을 먼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지만 한국에 연락을 해도 우리나라 사정이 워낙 안 좋아 책을 구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담당 교수한테 어려움을 토로했더니 그곳의 국립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서 동양문화를 공부할 수 있었죠”

이후 그는 유네스코의 추천을 받아 한국 관련 책을 쓰게 된다. 당시 유네스코 측에서 참고서적으로 동양문고 총서를 건네주었는데 거기에는 중국 인도 등 동양 각 국의 문화 철학 관련 서적 25권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를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해주는 책 한 권을 만나게 된다. 바로 〈법화경〉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돼 그는 불문학자이자 종교학자로 자리매김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법화경〉이 너무 쉽고 재미있게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당시 읽고 있던 성경보다 훨씬 더 내용이 좋고 재미있더라고요. 게다가 누가복음 같은 거는 법화경의 내용을 그대로 베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지로 성경 그 자체가 불교 안에 다 있었어요. 깜작 놀랐죠. 당시만 해도 서양문화가 너무나 우수하다고 생각했는데 법화경을 알고 나니 그렇지가 않았어요. 그때부터 불경과 성경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이후 그는 〈법화경과 신약선성서〉 〈성서의 뿌리〉 〈성경 속의 성 상〉 〈천수경〉 〈예수와 붓다〉 등 성경과 불경을 오가는 다양한 저서들을 펴낸다. 번역서도 다양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에밀〉 〈프로이트 정신분석〉 〈보바리 부인〉 〈몰리에르 희곡선〉 〈마호메트 평전〉 등 소설 희곡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저술해 왔다.

이렇게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올 수 있었던 건 그의 왕성한 독서력에서 비롯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하루는 독서에서 시작해 독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책 한 권을 읽고 아침식사 후 또 한 권 그리고 점심 후 한 권을 더 읽으면 하루 세 권의 독서가 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일 이런 일상이 이어진다고 하니 일년이면 1천권 정도를 읽는다고 한다.

이런 그의 독서 습관은 일제시대 학교를 다녔던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싸움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일본 아이들이 주로 다니던 학교와 한국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가 나뉘어져 있었죠. 그렇게 일본 아이 대 우리나라 아이들로 편이 나뉘어져 싸움이 붙었는데 우리가 두발장사(지금의 태권도)로 한국 아이들이 이기게 됐어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크게 돼서 학교에 알려지게 됐고 결국 선생님들의 주도하에 양쪽 학생들이 화해를 하면서 일이 마무리 됐어요”

그렇게 해서 당시 반장이었던 민 교수는 일본인 학생들과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 알게 된 한 일본인 친구의 집에 놀러 가게 되면서 책이라는 세계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 집에는 어린이용 세계문학전집이 즐비해 있었어요. 책이 귀했던 시절이라 그걸 보니 너무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이 책을 좀 빌려 갈 수 없냐고 물었더니 친구네 집에 와서 책을 좀 읽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당시는 전쟁중이라 집집마다 다 여자들 밖에 집에 없었어요. 남자들은 다 전쟁터를 나갔으니 적적했던 거지. 그래서 매일 가서 2시간씩 또박또박 큰 소리로 책을 읽어줬어요. 그렇게 몇 년을 하니 독서가 습관이 돼 버렸어요”

해방이 되고 중학생이 되어서야 한글을 겨우 배웠다는 민 교수. 모국어를 잃어버린 나라에서 비록 일어로 된 일본인들의 책을 읽어야 했던 서글픈 현실이 서글프기도 했었으리라. 하지만 당시의 독서는 어린 민 교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장발장〉 〈루팡〉 등 불란서 문학이 너무나 재미있었던 그는 불문학을 전공하겠다는 꿈을 꾸게된다. 또한 〈부처님 생애〉 등 어린인용 불교경전을 통해 불교적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이다.

민 교수는 얼마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책 발간에 저작권료를 기부했다. 일반책보다 제작비용이 훨씬 많은 점자책의 단가를 조금이라도 낮춰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시각장애인들이 좀더 가볍게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이자 보시다. 또 서양세계사를 서양인의 시선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저술하고자 하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서양사가 너무나 서양인들 중심적으로 쓰여 있어요. 역사도 문화도 모두 양면성이 있는데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어요. 분명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는 거죠. 한쪽 시각으로 치우친 역사들을 바로 잡아 보고 싶어요”

팔순을 바라보는 그의 물리적 나이는 학문에 대한 열정 앞에서는 무색했다. 그는 그렇게 오늘도 내일도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갈 것이다.

글=정혜숙 기자 bwjhs@hyunbul.com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